산업은행 기안기금 운용 회수 전략 강화에
정책자금 상환 따른 재무부담 커진 제주항공
핵심 계열사 부진에 애경그룹 재편 불가피
자산 매각 속도전 촉진…사업구조 변화 예상
-
애경그룹이 그룹 전반에 걸쳐 이례적인 재무구조 재편에 나서고 있다. 최근 보유하던 골프장(중부CC)과 화장품·생활용품 제조사(애경산업) 매각을 동시에 추진 중인 가운데, 그룹 항공사인 제주항공도 산업은행으로부터 받은 정책자금 일부를 조기 상환했다. 겉으로는 '재무구조 개선'이라는 설명이 붙지만, 시장에서는 기안기금 운용 만기를 앞둔 산업은행의 회수 압박이 자산 매각을 재촉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제주항공은 코로나 팬데믹 당시 약 1820억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을 지원받았다. 이중 약 1400억원은 장기대출, 약 400억원은 영구CB(영구전환사채) 형태로 공급됐다. 이후 제주항공은 2023년 말부터 지원금 상환에 나섰고, 이달 약 364억원 규모 영구CB 콜옵션도 행사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제주항공의 유동성 개선에 따른 조기상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영구CB는 만기 30년짜리 장기자금이지만, 일정 시점 이후 고금리로 전환되는 '스텝업 조항', 즉 경영상 제약 조건이 걸려 있어 실질적 만기와는 무관하게 조기상환 압력이 내포돼 있는 구조다. 여기에 기안기금 자체의 운용기한이 올해 말로 종료될 예정이어서, 산업은행 측의 회수 요구 메시지가 올해 들어 본격화됐다는 의견들이 나온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정책자금 성격상 기금 운용이 끝나기 전에 정리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며 "애경그룹이 시장에 자산을 본격적으로 내놓은 시점과 맞물린다"고 말했다.
실제로 제주항공 기안기금 CB 콜옵션 행사 결정과 중부CC 매각 본계약, 애경산업 매각주관사 선임 등 주요 자산 매각 일정은 올 상반기에 집중돼 있다. 이는 기안기금 회수를 의식한 유동성 확보 차원의 '속도전'이라는 평가로 이어진다.
제주항공의 재무구조 역시 이런 해석에 무게를 더한다. 지난해 말 516% 수준이던 부채비율은 올해 1분기 기준 614%까지 급등했다. 순차입금 6200억원 중 3744억원은 단기차입금이다.
차입금 증가세와 더불어 무안공항 착륙 사고에 따른 손실 반영도 겹쳤다. 이번 산업은행 영구CB 상환으로 부채비율은 추가로 악화될 수 있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최대 700~800%에 달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애경그룹 내부 분위기도 녹록지 않다. 애경케미칼은 석유화학 업황 둔화 속에 실적 부진이 지속 중이고, 유통 계열사인 AK플라자도 수년째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B업계에 따르면 애경케미칼과 AK플라자 모두 매각 가능성을 검토해봤지만, 시장 반응이 시원찮아 유보된 상태다. 결국 선택지는 뷰티 산업 재편 기대감이 깔린 애경산업, 그리고 프리미엄 부동산 자산으로 평가된 중부CC였다.
물론 이들 자산도 그룹 내부에서는 한때 '핵심 기반'으로 여겨졌던 영역들이다. 중부CC는 애경케미칼 명의로 보유 중이지만, 오너 일가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내부에선 우선매수권 확보 등을 전제로 한 '파킹딜' 성격의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됐지만, 유동성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서 결국 '완전 매각'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는 전언이다. 분위기상 그룹 차원에서도 더는 시간을 두고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경산업 역시 단순한 자산 매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주사격인 AK홀딩스를 포함한 특수관계자 경영권 지분 63%를 한꺼번에 내놓는 방식은 그룹의 지배구조와 사업 포트폴리오 자체를 흔드는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장에서는 약 5000억원 수준이 적정 밸류에이션으로 거론되지만, 애경 측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해 6000억원대 매각가를 희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최근 상법 개정으로 인해 소수주주 보호 조항이 강화되면서, 향후 인수 후 텐더오퍼(공개매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원매자들의 셈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애경그룹 내부 사정도 위기감을 반영한다. 지주사인 AK홀딩스의 배당은 수년 전부터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일부 계열사들은 대출 상환 전까지 임원급의 연봉 30%를 반납하는 조치도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AK플라자가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 상당수가 주력 계열사 방어에 집중되면서, 그룹 전반의 자금 여력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됐다는 게 투자자들의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은행의 회수 기조는 결과적으로 그룹 차원의 결단을 유도한 모양새다. 산업은행 내 항공금융을 담당하는 기업금융2실은 최근 아시아나항공 전담팀을 제주항공 전담팀으로 변경했다.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제주항공이 정부의 주요 모니터링 대상이 된 셈이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제주항공에 대해 운영비 절감, 기단 교체 등 세부 지침을 내리고, 기안기금 상환과 관련한 관리 강도를 높였다"며 "기안기금 조기 상환 자체가 의무는 아니지만, 산은이 구조상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자산 매각이 급물살을 탔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산업은행 측은 "개별 거래처의 상환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