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여건 무르익기 전이나 '시범타' 피해야 하는 기업들
눈치보기 비용부터 리빌딩·IR 강화까지 자문수요 증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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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 근간을 겨냥한 상법 개정안 공포를 앞두고 법무법인, 회계법인 등 자문업계가 대응 채비를 갖추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개정안의 실질 영향력을 가늠하진 못하고 있으나 기업들은 시범 사례로 선정되는 불운만큼은 피해야 한다. 경영 판단에서 돌다리를 두세번 더 두드려야 하게 됐으니 자문 비용도 늘어날 공산이 크다. 자문업계에선 관련 새 먹거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커지고 있다.
삼일PwC 거버넌스센터는 오는 11일 '상법 개정안과 이사회의 대응'을 주제로 웨비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김앤장, 광장, 태평양, 율촌, 세종 등 대형 로펌들이 일찌감치 관련 태스크포스(TF) 등 전담팀을 꾸리기 시작한 데 이어 회계법인에서도 기업들의 자문 수요를 확보하려 팔을 걷어붙이는 모습이다. 새 정부 출범 한 달여 만에 상법 개정이 재추진되자 상장사 사내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로펌에 합류한 사례도 벌써 전해진다. 개정 상법에 대한 재계의 부담이 커지는만큼 자문업계의 기대감도 커지는 장면으로 풀이된다.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현재 정부 이송, 국무회의 등 절차를 앞두고 있다.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 전체로 확대하고 ▲상장사 사외이사를 독립이사로 변경 ▲감사위원 선출 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3%룰' 강화하는 등이 주요 골자인데, 이사 충실의무 확대는 공포 즉시 시행된다.
이르면 이달부터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손봐야 한다. 개정 후 상법 제382조의3(이사 충실의무)이 이사에게 총주주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주주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계열사 합병, 분할부터 자사주 소각 문제까지 주주 간 입장이 대립할 수 있는 사안 전반에서 이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일본 등 해외에서도 한국이 이렇게 빨리 상법 개정을 통과시킨 것을 두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라며 "경제단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액주주들의 소송이 남발하는 등 부작용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굳어진 재계의 경영 판단, 의사결정 구조를 손봐야 하는 것은 맞다"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사 경영판단의 책임이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발생하느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회사법의 헌법 격인 상법을 개정한 만큼 오너나 최대주주 중심 지배구조에 대한 압박은 강해지겠지만 각론 차원에서 구체적 적용 범위는 앞으로 법원의 해석과 판례 형성을 지켜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이사회에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교환사채(EB) 발행에 쓰겠다고 의결하면 주주 대표소송에 직면할 수는 있어도 최종적으로 법원이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알기 어렵다. 기업마다 처한 사정이 다른 만큼 애초에 이사의 경영판단을 일률적으로 규율하거나 책임 범위를 단정하는 데 한계가 따른다. 소송이 벌어지더라도 최종 판결까지는 물리적으로 3~4년 소요된다. 상법 개정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제도적 여건이 무르익기까지 또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결국 당장에는 기업들이 눈치를 살피는 비용부터 순차로 지불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 '1호 민생법안'에서 시범 케이스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방어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문업계에선 주주들이 문제를 제기할 만한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사회 의사결정 구조를 재정비하고 ▲주주 이익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소명자료를 마련하고 ▲정서적 저항이 큰 경영판단에 대해선 우회로를 마련하고 ▲IR 기능과 창구를 대폭 강화하는 등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선 전부 비용이지만 자문업계에는 새로운 수익원이다.
기존 거수기 구조의 이사회를 정비하고 개정 상법에 맞춰 재교육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업 기회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오너, 최대주주에 쏠려 있는 무게중심을 이사회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개별 이사 권한은 커지고 교체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진 덕이다. 기존 사내 변호사들도 상법 개정의 특수를 노리고 개업이나 로펌으로의 이적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자문업계 다른 한 관계자는 "2년 전 은행지주 같은 소유분산 기업들이 금융당국의 내부통제 강화 기조에 발맞춰 로펌이나 컨설팅 업계를 드나들던 게 상법 개정을 기점으로 재벌 대기업 그룹사로 확산하는 양상"이라며 "과연 재계가 미국식 이사회 중심 구조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하지만 주주 관리, 준법 비용이 늘어나는 방향은 확실해졌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