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롤모델 된 '생존전문가' 하이닉스…오너들의 숙제는 더 커졌다
입력 2025.07.17 07:00
    Invest Column
    존폐 위기에서 韓 대표기업으로
    현대·LG·SK 버무려진 기업 문화
    엔지니어 CEO들의 '일관된' 리더십
    이를 능가할 재계 기업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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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1년, 하이닉스는 10년만에 첫 TV광고를 내보냈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통해 그간 수많은 굴곡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일궈온 회사의 저력을 강조했다. 매각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기업 이미지와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하이닉스를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꼽는 것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시가총액은 218조원을 넘어서며 코스피 2위에 올랐다. 삼성전자가 370조원에 육박하며 1위를 지키고 있지만 반도체라는 개별 산업만 놓고 보면 이미 SK하이닉스가 넘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부족하다. 

      주식 시장에선 매일 같이 SK하이닉스 '찬양'이 끊이질 않는다. 2001년 한때 주가가 1000원대 이하로 떨어지는 등 존폐 위기에 처했었는데 지금은 30만원대를 돌파하며 이젠 '30만닉스'가 됐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독주에 2분기 영업이익이 역대 최대인 9조원에 달할 거라는 전망들이 나오면서 "천장은 있는거냐?"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HBM이 인공지능(AI) 열풍에 힘입어 소위 대박이 난 건 맞다. 그런데 SK하이닉스와 일을 해 본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재벌기업에선 느낄 수 없는, 하이닉스만의 기업 문화를 정수(精髓)로 꼽는다.

      일단 일을 참 잘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설계든 공정이든 맡은 일을 척척 잘해낸다고 한다. 일감 없을 때도 있었으니 고객의 주문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서로의 능력과 실력을 인정해주는 문화도 한몫한다. 학연, 지연 같은 배경보다는 실제 퍼포먼스와 기술적 기여를 우선시하다보니 경쟁사에서 온 인력들도 딱히 불만이 없다. 그러다보니 인재들이 모인다. 회사에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서도 이 정도면 여타 재벌그룹에선 느끼지 못할 '훈훈함'이 있다.

      누군가는 SK하이닉스를 'Born to be Survivor', 즉 '타고난 생존자'라고 지칭한다. 현대전자로 시작해 정권 주도의 빅딜로 LG 인력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룹이 산산조각 나면서 한 때 주인을 잃고 정책금융에 의존하다가 다시 SK로 들어갔다. 여러 기업 문화가 뒤섞였다. 누구 하나 텃새를 부릴 틈도 없이 생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5대 그룹, 10대 그룹이라는 큰 우산 아래에서 보호받던 여타 기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들이었다. 이런 비빔밥 같은 회사가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일관성 있는 CEO들이 이어졌다는 점도 흔치 않다. SK그룹으로 편입 이후 대표이사를 맡은 박성욱, 이석희, 곽노정 라인은 모두 현대전자산업으로 입사한 엔지니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업(業)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들이 진두지휘하니 경쟁력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재벌 기업 상당수는 오너 경영인들의 경영 능력을 직접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입김과 간섭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역시나 SK하이닉스 찬양론처럼 흘러갔지만 이는 고강도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SK그룹 입장에선 아픈 얘기이기도 하다. 하이닉스마저 없었다면 SK그룹이 이 위기를 감당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최창원 수펙스 의장의 2년 동안 "그룹이 레버리지 시대에 무분별한 확장으로 외형만 커지고 내실은 채우지 못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SK하이닉스의 '성공 가도'와는 너무나도 비교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하이닉스처럼 하지 못하나"라는 질문에는 여타 계열사의 전현직 고위 경영진들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그만큼 2년간 지속되는 그룹의 구조조정은 구성원들에게 힘겹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삼성그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도 한 때는 엔지니어 CEO들이 득세를 할 때가 있었고, 그 때가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황창규, 권오현, 신종균 등 엔지니어 출신 CEO들이 물러난 이후 ‘초격차’ 이미지를 상실했다. 오너의 사법 리스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는 태스크포스(TF)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 현장과 거리가 먼 사업지원TF가 반도체 부문의 인사, 재무 등의 권한을 유지 또는 강화하면서 삼성전자 반도체의 전문성은 점차 옅어졌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위기’라는 단어 앞에서 엔지니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고 회사와 그룹에 실망한 수많은 인재들이 떠났다. 뒤늦게 전영현 부회장이 반도체 키를 잡았지만 사업지원TF는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보다 '찬양'할 만한 회사가 SK하이닉스 정도밖에 없다는 건 한국 재계 전체의 문제이다. "왜 우리 그룹엔 하이닉스 같은 계열사가 없을까" 오너 경영인들은 곱씹고 또 곱씹어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