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공 공매 요구 발단…대주단 전원 동의 필요
책임은 없고 권리만…사업 정상화는 뒷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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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태영건설이 책임준공을 확약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준주거 시설 사업장을 두고 소송전이 벌어졌다. 선순위 채권자인 과학기술인공제회(과기공)의 공매 요구를 수탁자가 거절하면서다. 이번 소송은 겉으로는 단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 분쟁처럼 보이지만, PF 시장의 '책임의 공백'이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한국증권금융이 한국투자부동산신탁(수탁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워크아웃 진행 중인 태영건설의 반포 주거복합 개발사업과 관련해 선순위 대주인 과기공이 공매를 요구했으나, 한국투자부동산신탁이 신탁계약서상 대주단 전원 동의가 필요하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송은 지난 4월에 제기돼 현재 초기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선순위로 들어간 과기공은 수익자이며, 과기공이 대주 펀드인 '브이아이 BH 일반사모부동산신탁'을 통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소송 주체는 한국증권금융이 된다.
해당 사업장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인근에 지하 4층~지상 20층 도시형생활주택 72가구, 오피스텔 25실 등 주거복합시설을 짓는 사업이다. 이 사업에 현재 과기공은 선순위 936억원(약정액 1520억원)과 중순위 350억원을, KB증권은 중순위 150억원과 후순위 100억원의 대출을 내줬다. 지난 2022년 11월 착공했으며, 공정률은 30% 정도다.
시행사는 특수목적법인인 반포센트럴피에프브이(PFV)다. 반포센트럴PFV 지분은 ▲대우건설 보통주 19.6%, 우선주 33.3% ▲이스턴투자개발 보통주 29.4% ▲KB증권 우선주 9.4% ▲한국투자부동산신탁 우선주 5.9% ▲에큐온캐피탈 우선주 2.4% 등이 나눠 가졌다.
과기공은 해당 사업장을 공매로 넘겨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공매로 넘어갈 경우 과기공이 선순위 지위에 있지만 중순위 대출까지 참여했기 때문에 일부 손실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우선주와 중·후순위로 들어간 곳들은 전액 손실 가능성도 있다.
시장에서는 과기공 같은 공제회급 기관이 직접 소송전에 나서는 경우는 보기 드문 상황이라고 밝혔다. 부동산 PF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유형의 PF 관련 소송은 작은 저축은행이나 소형 펀드들이 종종 한다"면서도 "통상 과기공 같은 몸집이 있는 곳은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해 몸을 사리는 편인데 특이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또 약정서상 공매를 위해서는 대주단의 3분의 2 이상 동의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에 신탁사가 소송에서 질 가능성은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과기공 입장에서도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법정공제회인 만큼 배임 이슈를 피하려면 내부적인 이유로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금융권 변호사는 "계약서상 다수 대주단 동의 요건이 있어 신탁사가 소송에서 지기 쉽지 않다"며 "(해당 소송은) 압박용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해당 사업장은 도생이라 사업성이 좀 안 나오긴 해도 위치를 이유로 완판이 가능한데 과기공이 그걸 모르겠냐"며 "여러 사업장을 조정하다 보니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공제회 내부적으로 담당자 면피 목적에서라도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시장의 룰 안에서 움직이는 거라 과기공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고 덧붙였다.
시장에서는 이번 소송전에 대해 국내 부동산 PF 시장의 구조적 한계가 빚어낸 결과라고 짚었다. 수익자인 공제회는 공적 자금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신탁사는 계약서에 명시된 절차를 준수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처럼 책임과 권한이 분산된 구조에서 조율이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사업 정상화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PF 시장 '책임 공백'의 구조적 리스크가 언제든 또 다른 사업장에서 되풀이될 수 있다.
앞의 관계자는 "수탁자는 판을 짜지만 주도권은 수익자에게 가고, 서로의 권리 주장을 하다가 결국 분쟁만 남는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PF 시장 사업에서 수익자, 수탁자, 금융기관 등 각자의 입장만 내세우면 누가 어떤 책임을 지고 정리를 할지 명확하지 않다"며 "시장에서 반복되는 문제인 만큼 이를 보완할 표준화된 책임 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