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 줄이고 스페셜티 늘리자 방향성에도 누가 앞장서려 할지
정부도 아이디어 독려·고충 확인 등 종합대책 마련하려 분주
제도적 병목 해소에 시일 필요…합의점 찾아야 본궤도 진입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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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밑그림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으나 실행 시점을 두고 여전히 난관이 예상된다. 범용은 줄이고 특화 비중을 늘린다는 방향성은 확인됐지만 기업 입장에선 선뜻 총대를 메기 버겁다. 마중물을 대야 하는 정부도 재정 지원부터 제도 정비를 명확히 하기까지 할 일이 산더미다. 당분간 정부와 기업이 각기 시나리오를 검토해 보는 과정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내부적으로 대산에 이어 여수 지역 납사분해설비(NCC)에 대해서도 매각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확인된다. 최근 업계에서 정밀화학 사업 매각설 등 뜬소문도 돌았지만 큰 틀에서 범용 기초소재 부문부터 줄이겠다는 방향성은 유지되는 것이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대산 석유화학 산업단지 내 NCC에 대해서도 통폐합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LG화학의 여수 NCC도 매각 예정 자산이고 한화와 DL그룹 합작사인 여천NCC 역시 정리 고민이 한창임을 감안하면 대형 산단에서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발을 빼는 형국이다. 여수는 에틸렌 생산능력 기준 국내 두 번째 석유화학 산단으로 입주사나 종사자 수 모두 대산에 비해 규모가 크다. 롯데케미칼을 포함하면 약 400만톤 이상의 NCC 캐파(Capacity)가 잠재적으로 조정 상태를 앞두고 있다.
기업 대부분이 기초 석유화학 사업 정리, 축소를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노후 설비를 통폐합하고, 감산으로 캐파를 줄여서 공급과잉을 해소해도 중장기적으로 원가에서 앞서는 중국, 중동 업체와 경쟁하기는 버겁다"라며 "그룹사마다 지역별 정무적 판단들도 검토하고 있지만 통합 NCC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전했다.
당장 재무 상태에서부터 현실적 제약이 크다. 최근 SK지오센트릭은 울산 내 경쟁사에 NCC 인수를 제안했는데 그룹 차원에서 진행 중인 사업 조정, 재무개선 작업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진다. 중국 증설에 치여 수급 균형이 무너진 뒤 국내 NCC 전반이 4년째 적자를 지속해온 터라 다른 업체 사정도 대동소이하다.
합작법인(JV)도 대안으로 떠오르지만 향후 경쟁력 제고까지 기대하긴 힘든 방식이란 지적이 많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공동지배하는 여천NCC처럼 양사 모두에 계륵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사업 구조나 재무사정, 체급이 서로 다른 그룹사가 맞손을 잡아도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기 쉽지 않은 탓이다. 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 시그널을 내기 시작했다면 이참에 털고 나갈 유인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증권사 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통합 NCC를 운영하는 주체가 나와주면 기존 화학사들은 고부가 스페셜티에 집중하는 식으로 재편이 가능할 텐데, 그걸 누가 할지가 불투명하다"라며 "여수 지역 4개 NCC 중 2~3곳만 합쳐도 동북아 최대 규모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감당할 곳도 잘 안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부도 마중물을 대기 위해 고심이 크지만 난관이 적지 않다. 석유화학처럼 최대 시장인 중국이 순수출로 돌아서며 공급과잉이 불거진 업종에선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활법)으로 산업 재편을 유도해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선 활용 유인이 부족하다. 공정거래법상 기업결합 장벽을 낮추고 세금을 감면하고 국책은행을 동원해 재정을 투입하는 등 종합대책이 필요하단 얘기다. 다수 부처 간 조율과 국회 동의까지 필요한 만큼 시일이 필요하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각 산단에 위치한 기업들에 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있지만 종합대책을 내놓으려면 기획재정부, 공정위, 금융위 외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도 법 개정에 나서줘야 한다"라며 "과거 조선, 해운업 구조조정 때도 기활법을 새로 손보는데 상법과 공정거래법, 세법상 독소 조항을 두고 말이 많아서 1년여 정도 시간이 소요됐다"라고 설명했다.
새 정부의 1기 장관 인선이 마무리된 만큼 연내 민관이 구체적 구조조정 계획을 맞춰가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구조조정의 제도적 틀과 완충 장치를 정비하는 동안 기업들도 각기 자산을 어떻게 줄이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개선할지 조율을 지속해야 하는 셈이다.
정부 종합대책이 기업에 충분한 유인을 제공할 수 있다면 구조조정 선봉에 나설 기업도 조만간 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때까진 각자 실익과 손익을 따져보며 유관 부처와 고충을 주고받고 실무를 조정하는 과정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간 차원에서 정부가 받아들일 만한 재편안을 마련해 내면 정부 논의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