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사, 정비사업서 출혈 경쟁
강남권은 신탁 재건축 수요 감소
외부 전문가 영입 선호 움직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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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재건축 시장에서 신탁방식 정비사업의 입지가 눈에 띄게 좁아지고 있다. 정비계획 수립 전부터 부동산 신탁사들이 사업장에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실제 사업권 확보로 이어지는 사례는 드물다. 특히 강남권에서는 신탁방식 수요 자체가 크게 위축된 분위기다. 신탁사들의 핵심 강점으로 꼽히던 '금융력' 마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조합 설립 없이도 사업을 추진할 수 있고, 자금 조달이 수월하다는 점에서 한때 각광받았다. 그러나 책임준공형 신탁 사업 확대로 신탁사들의 재무 부담이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탁사들의 신용등급은 코람코자산신탁(A/S), 한국자산신탁(A/N), 한국토지신탁(A-/S)로 일부 대형 건설사보다 낮은 신용등급을 유지 중이다. 본래 신탁사가 제공하던 자금 보증 역할조차 대형 건설사들이 더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건설사가 신탁사보다 신용등급도 더 높고, 시공사 선정 후에는 건설사가 자금 조달이나 PF 보증까지 모두 해결하기 때문에 굳이 신탁사를 끼워야 할 이유가 없다"며 "신탁사가 시공사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공사비를 낮춰주겠다고 조율에 나서지만 이런 건 결국 마감 품질 저하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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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의도 대교아파트는 KB부동산신탁을 예비사업시행자로 선정했지만 조합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고, 방배삼호아파트도 한국토지신탁과 협업을 접고 조합 주도로 재편했다. 일부 단지에선 외부 전문가를 직접 영입해 조합이 실질적인 시행 주체로 나서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신탁사들은 수주 확보를 위해 '저가 수수료'를 내세우는 등 출혈 경쟁까지 감수하고 있다. 서울 양천구 목동 일대 재건축 사업장에서는 대신자산신탁이 수수료율 0.5%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통상 분양 후 발생한 매출의 1~3%가 수수료로 책정된다.
신탁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금융당국이 차입형 토지신탁에 대한 규제 강화 방침까지 내놓으며 신규 사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융위원회는 2027년까지 차입형 토지신탁의 총 위험액을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할 방침이다. 차입형 신탁사업까지 제약을 받으며, 신탁사들이 주력해 온 고수익 구조에 직접적인 제약이 생기게 됐다.
정비계획이 지정되기 전엔 신탁사 참여가 원칙적으로 제한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신탁사들이 정비계획 수립을 도와주거나 관청과의 협의를 사전에 주선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잦다. 서초·반포·목동 등 주요 지역에서는 정비계획 입안 이전부터 신탁사 간 입찰 경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사전 접촉이 실제 수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평가다.
핵심 입지인 강남권에선 상황이 더 어렵다. 강남에선 분양불로 계약을 해도 분양이 워낙 잘되기에 굳이 신탁사를 끼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일부 대형 단지들은 조합이 직접 시공사와 협상해 사업을 마무리 짓고 있다. 반포구 '원베일리'의 경우 조합은 외부 전문가인 한형기 씨를 영입해 사업을 주도적으로 끌고 갔다.
강남권에서도 이해관계가 복잡한 재건축 단지의 경우 여전히 신탁방식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입찰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초구 한신서래아파트는 인접한 신반포궁전아파트와 현대동궁아파트와 함께 통합 재건축이 논의되고 있다. 서초구청은 세 단지를 하나로 묶는 방안을 권유하면서 논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소유주들 사이에서도 통합 추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다.
통합 재건축이 추진될 경우, 각 단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 특히 신반포궁전은 이미 정비계획 지정이 완료된 상황이라 한신서래와의 통합에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최근 소규모 단지의 공사비가 평당 1000만원 이상으로 급등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사업비 절감을 고려하면 통합 필요성이 부각될 여지도 있다. 신반포궁전이 입지적으로 우위에 있는 만큼, 향후 통합 조건에 따라 인센티브 제공 방안이 제시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신탁방식은 이해관계자 간 갈등 조정, 기획과 자금관리까지 일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수요가 있다. 이를 겨냥해 한국토지신탁은 조합 측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접촉에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내부 분위기는 조합 주도로 가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정비업계 한 관계자는 "신탁방식은 자금관리 투명성, 이해관계 조율 등에서 장점이 있지만 신용등급 하락과 정책 변화 등으로 인해 조합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진 게 현실"이라며 "특히 강남처럼 입지 경쟁력이 높고 수요가 탄탄한 지역에서는 조합이 직접 전문가를 영입하거나 시공사와 손잡고 움직이는 방식이 훨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일산이나 평촌 등 비(非)강남권 지역에선 신탁사들이 여전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일산 강촌마을 3·5·7·8단지 통합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는 최근 예비시행자 선정을 위한 입찰을 진행 중이며, 한국토지신탁 등 주요 신탁사들이 입찰 의사를 밝힌 상태다. 평촌 샘마을 통합 재건축 추진위 역시 예비시행자 선정을 위한 주민 동의를 받는 중으로, 한국자산신탁과 한국토지신탁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