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주주’ 국민연금 의결권 무게감 커져
일본 연기금 사례 대안으로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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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상법 개정 이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액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가 법제화되면서 주주소송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다수 상장사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의 입김도 이전보다 한층 강화됐다. 경영권 분쟁이 빈번해질수록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캐스팅보트’를 넘어 시장 규율의 주축으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실제 최근 진행된 일부 경영권 분쟁에서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향방은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상법 개정 이후 이 같은 사례는 더욱 잦아질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독이 든 성배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제기된다. 투자자 권리 보호라는 순기능과 동시에, 책임소재와 논란의 가능성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여야 합의로 이달 초 국회를 통과했다. 핵심은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기존 ‘회사’에서 ‘모든 주주’로 확대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주주는 이사회의 의사결정에 대해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특히 주요 주주 지위를 가진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의결권 행사에 더욱 신중하고 정교한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이 됐다.
국민연금은 현재 국내 상장사 중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만 271곳,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곳도 35곳에 달한다(2024년 말 기준). 지난해 HDC현대산업개발을 비롯해 HD현대미포조선, 삼성증권, 한화엔진 등에서 지분율을 1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부의 ‘밸류업 정책’ 기조에 발맞춰 올해에도 국내 주식 비중을 높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실상 의결권 영향력은 과거보다 더 커졌다.
국민연금은 이러한 흐름에 대응해 내부 의결권 행사 체계도 정비하고 있다. 2023년에는 ‘지배구조 개선 자문위원회’를 신설했다. 이 기구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의사결정에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설치됐다. 위원회는 김태현 이사장이 위촉한 외부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됐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제도 정비는 과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논란에 휘말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한 지배구조 전문가는 “당시 사례를 계기로 국민연금은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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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여전히 ‘슈퍼 주주’로서의 부담을 수반한다.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향후 주주 간 소송이 늘어날 경우 법적 책임 소재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이에 따라 해외 주요 연기금의 사례에서 시사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 비교 사례는 일본의 GPIF(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다. GPIF는 일본 정부의 밸류업 정책과 함께 국내 주식 비중을 2010년 말 11.5%에서 최근 약 25%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기업가치 제고와 시장 신뢰 확보를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ESG 및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했으며, 일본 증시 상승의 ‘조용한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GPIF는 국민연금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GPIF는 의결권 행사를 전적으로 위탁운용사에 맡기고, 자체적으로는 평가·모니터링에 집중하는 ‘간접형 스튜어드십’ 모델을 택하고 있다. 국내와 달리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이나 법적 책임 리스크를 줄이는 방식이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전 회장도 “일본 GPIF는 의결권을 위탁운용사에 넘기고, 자산 소유권 및 책임까지 함께 위탁하는 구조”라며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자산운용사를 평가·감시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의 절반가량을 자체 운용하며, 의결권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직접 행사하고 있다. GPIF와는 근본적인 시스템 차이가 있는 셈이다.
한 기관투자자는 “국내에서도 주주 간 소송이 본격화되면 국민연금이 법적 책임 논란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수 있다”며 “책임 있는 투자와 정치적 중립 사이의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