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어음 인가시 글로벌PE 대비 경쟁력도 커져
기업들 자금조달 위해 찾아올 상황 늘어날 듯
정통IB 되려면 부동산·고리대금 '업자' 이미지 쇄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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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투자은행(IB)을 선언한 메리츠증권이 거듭날 수 있을까. 메리츠증권의 최근 행보는 증권업계를 넘어 한국 자본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흥미로운 주제다. IB업계 인력들을 팀 단위로 모으더니 글로벌PEF를 제치고 재벌기업의 조 단위 구조조정 딜(deal)을 따내며 시장 관계자들을 놀래켰다.
유동성 위기나 구조조정이 필요한 대기업들에 자금을 대면서 메리츠증권의 성과(?)가 하나둘 이어지고는 있지만 이게 정통 IB로 가는 길을 담보하진 않는다. 다른 금융사들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리스크를 감내한 공격적인 수익 추구 투자 스타일을 두고 'IB'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모펀드(PEF)'와 유사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이 추진한 5조원 규모 액화천연가스(LNG) 유동화는 리밸런싱을 진행중인 SK그룹에 있어 가장 중요한 딜이었다. 위기의 진원지인 SK온에 유동성이 공급돼야 하기에 여러모로 복잡다단했다. 딜의 주선 경쟁은 대규모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글로벌 사모펀드(PEF)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브룩필드자산운용의 2파전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메리츠'의 이름이 등장했고 그렇게 3파전 양상이 됐다.
초기에는 메리츠증권이 들러리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다. 신디케이션을 쓰지 않고 단독으로 물량을 가져가는 걸 선호하는 메리츠증권 특성상 5조원 규모의 딜은 감당하기에 컸다. SK이노에 제시한 6%대 금리는 평소 '고리대금업자'라는 이미지와도 크게 달랐다. 그런데 KKR과 메리츠증권의 2파전으로 좁혀지더니 최종적으론 메리츠증권이 따냈다.
KKR은 SK이노베이션이 보유한 SK E&S 발전소 자산을 SK이노베이션이 100% 보유한 특수목적회사(SPC)에 양도하고 SPC가 전환상환우선주(RCPS)를 발행하면 이를 KKR이 인수해주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을 제시했다. 반면 메리츠증권은 SK E&S 발전소 자산을 담보로 SK이노베이션이 발행한 전환우선주(CPS)를 인수하는 동시에 SK온에 주가수익스와프(PRS) 형태로 투자하는 방식을 내밀었다.
국내 IB업계 관계자는 "결국 SK그룹의 리밸린싱 핵심은 SK온이고 SK온에 직접적인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는 게 중요했다"며 "여러모로 투자하기가 부담스러워진 SK온에 이 같은 지원을 감당할 수 있는 금융사는 현재로선 메리츠 외엔 없었다"고 설명했다.
메리츠증권은 2025년을 정통 IB 원년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연초 기업금융본부를 신설하고 정영채 전 NH투자증권 사장을 상임고문으로 영입했다. IB인력들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여의도에선 '어벤져스'를 만들고 있다고 회자될 정도였다.
메리츠증권은 초대형IB의 발판인 발행어음 인가도 신청한 상태다. 메리츠증권은 메리츠화재 같은 계열 보험사를 통해 장기자금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발행어음까지 더해져 저리의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면 국내에서만큼은 글로벌PE들과 가격 경쟁력에서 크게 앞설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단기적인 유동성 공급이 필요하거나 중장기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대기업 입장에선 메리츠증권을 찾아갈 수요는 하나둘 늘어난다.
다른 관계자는 "재벌 기업 중 유동성이 시급하거나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곳들은 매칭되는 투자자들을 찾기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대형IB들도 이를 주선하면서 얻는 실익은 크지 않다"며 "이러니 대기업들로서는 메리츠증권에 줄을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분명 메리츠증권 IB의 잠재력은 있어 보이지만 발행어음 인가를 받고 초대형IB가 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질문엔 이견이 적지 않다. 이는 '신뢰'라는 단어를 메리츠에 붙일 수 있는가로 집결된다.
자본시장에서 메리츠증권은 소위 '업자'로 불려왔다. 그동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나 고금리 대출 등 고수익 구조화 모델을 통해 높은 수익을 창출해왔다. 주력 사업과 수익 창출 스타일이 결부된 이 이미지는 IB업계에선 꽤나 부정적으로 쓰여왔다.
메리츠증권이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던 롯데건설에 1조5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하며 롯데그룹과의 관계를 트긴 했지만 10%가 넘는 고금리를 제시했다. 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분쟁중이었던 고려아연도 메리츠증권에서 1조원을 빌렸는데 6.5% 금리였다. 이처럼 위기에 몰린 기업들이 메리츠증권을 찾아가면 당장 한숨을 돌릴 수는 있지만 높은 금리 탓에 오히려 위기를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새마을금고 비리에 연루된 M캐피탈에 대규모 양도담보를 잡고 수천억원을 대출할 당시에는 '범죄혐의에 연루돼도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까지 받기도 했다.
메리츠증권의 기업금융 부문의 실적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DCM, ECM 등 전통적인 IB부문에서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지 않다. SK이노 딜과 관련해서도 정영채 고문의 역할론과 메리츠증권의 트랙레코드 여부를 두고 의견들이 엇갈린다.
국내 증권사 관계자는 "장기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정통 IB를 하려면 돈이 안되는 비즈니스도 해야 하고, 그렇게 해도 종국엔 딜을 따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며 "정통 IB를 하려면 고리대금업자라는 딱지를 떼내야 하는데 내부적으로 고수익을 포기하는 기조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겠고 수익을 내지 못하면 뽑아온 IB 인력들이 다시 이탈할 수 있는 딜레마가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PEF업계 관계자는 "정통 IB는 기업금융뿐 아니라 M&A 자문, 자산 관리, 트레이딩, 리서치 등 모든 IB 영역에서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갖춰야 하는 종합금융서비스"라며 "하지만 그간 메리츠증권의 행보나 이미지는 IB라기보다는 고수익을 추구하려고 리스크를 감내하려는 PEF와 유사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벌기업들이 메리츠증권을 찾아갈 일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메리츠증권이 정통 IB로 자리잡으려면 회사 내부적으로나 시장의 잠재적 고객들에게나 '신뢰'라는 이미지를 각인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