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과제' 편입에 급물살 타는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
'주가 받치는 연금' 될까…시장은 기대감 커지지만
손실은 가입자 몫?…운용 책임·정치 논란 커질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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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증시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정부의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가 퇴직연금에 국민연금식 기금형 운용 모델을 도입하는 방안을 본격 검토하면서, 자본시장에서 이를 '주가의 새로운 버팀목'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다만 정책효과에 선반영된 주가 흐름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퇴직연금 가입자들 사이에선 '고점 물림' 우려도 확산되고 있다. 퇴직연금은 사적 연금인 만큼 손실이 발생해도 정부가 이를 보전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의 401k처럼 세제 혜택을 통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일 금융권과 정치권에 따르면, 정부는 퇴직연금 기금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세부 방안을 마련 중이다. 낮은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하기 위해, 공적 운용기관 설립 등을 통해 자산을 집합 운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미 여당을 중심으로 관련 법안이 다수 발의됐으며, 새 정부 들어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에서는 기금화가 '도입 여부'가 아닌 '시점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하다. 다만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인 은행·증권사들의 반발이 여전한 만큼, 제도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정부와 여당이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 의지가 강한 만큼, 기금화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제도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며 "기존 사업자들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당국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시 상승과 기금화 논의가 맞물리면서, 가입자들 사이에선 '고점 매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코스피는 지난 4월 연중 저점(2284.72) 대비 40% 가까이 상승해 지난 15일에는 3,200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실물 경기나 기업 실적 개선보다는 정책이 주도한 랠리라는 점에서 시장 일각의 경계심도 뚜렷하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여당은 상법 개정, 자사주 소각 유도, 배당 확대, 배당소득세 감면 등 자본시장 정책을 연이어 발표했다. 상반기 외국인과 개인의 동반 순매수세도 이 같은 정책 기대감에 기인한 흐름이었다는 평가다. 실제로 외국인은 5~6월 두 달간 약 5조원을 순매수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해외 투자자들과의 미팅을 해보면, 한국 증시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 시각이 많다"며 "정책 기대감이 선반영된 과열 국면이라는 진단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정책 기대의 정점에는 퇴직연금 기금화가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두고 '퇴직연금으로 증시를 받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상장사에 대한 배당 확대와 소액주주 보호 기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기금 자금의 주식시장 유입은 중장기적인 수급 안정 요인으로 해석된다.
증권업계는 기금화가 현실화될 경우 단기간 수십조원 규모의 자금이 증시에 유입될 수 있다고 본다. 연간 50조원 가까이 적립되는 퇴직연금의 일부만 주식에 편입해도 외국인 순매수에 버금가는 유동성이 창출된다는 설명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기금 유입 자체가 증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며 "최근 정책 랠리의 연장선상에서 기금화도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금처럼 증시가 과열된 시점에서 정부 주도로 주식 비중을 확대하면, 결국 '연금이 고점에 매수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퇴직연금은 현행법상 손실 발생 시 정부가 보전할 책임이 없다. 일각에선 "정책 명분을 내세워 연금 자금을 동원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기금화 시점에 주가가 고점이면, 가입자들이 고스란히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며 "손실이 발생할 경우 정치적 책임 공방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미국의 퇴직연금제도인 401k처럼 세제 인센티브와 기본 운용 모델을 제공하되, 선택권은 가입자에게 남겨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국민연금처럼 주식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모델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보다, 채권·인프라·부동산 등 안정적 자산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운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분석이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어디까지나 근로자의 노후자산인 만큼, 운용 안정성과 수익률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며 "정책의 방향성이 자본시장 활성화에만 초점이 맞춰질 경우, 오히려 가입자 신뢰를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