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동화·SRT 등으로 RWA 규제 대응
국내는 제도 미비·시장규모 작아 제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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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가계대출 억제 정책 속에서 국내 은행들은 기업대출 확대가 불가피해졌다. 다만 기업여신이 늘어날수록 은행의 위험가중자산(RWA)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요구되는 자본적립 부담도 커지게 된다. 자본비율 관리가 필수적인 은행 입장에선 기업대출 확대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은행권은 부실채권 상각이나 저위험 자산 중심의 포트폴리오 조정을 통해 자본비율을 방어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만으로는 급증하는 기업대출 수요를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이에 금융당국에 RWA 제도 완화를 요구하는 은행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슷한 고민은 미국 은행들 역시 겪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가 추진 중인 '바젤 III 엔드게임(Basel III Endgame)' 규제안은 대형 은행들이 보유한 대출자산에 대해 더 많은 자본을 적립하도록 요구한다. 2023년에 발표된 이 규제는, 지난 7월 1일부터 단계적으로 시행 중이다.
주요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JP모건과 모건스탠리 등 미국 은행들은 RWA 규제 강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출유동화와 SRT(중요위험전이) 등의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은행들의 이러한 RWA 우회 움직임을 'RWA 최적화' 또는 'RWA 다이어트'로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출유동화는 미국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기초자산으로 한 ABS(자산유동화증권) 또는 CLO(대출담보부증권)를 발행해 시장에 매각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은행들은 대출자산을 재무제표 상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RWA를 줄이고 자본적립 부담도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SRT는 은행이 대출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해당 자산의 손실 위험만을 CDS와 같은 신용파생상품을 통해 외부 투자자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SRT를 통해 위험이 은행이 아닌 외부로 전이되었다고 간주해 RWA를 낮출 수 있다. 이 방식은 자산을 매각하지 않기 때문에 유동성이나 고객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본비율을 개선할 수 있다는 평가다.
국내 은행들 역시 RWA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국 은행들의 유동화 사례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 내부적으로 스터디를 진행했고, 일부이긴 하지만 실제 유동화를 진행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국내에서는 미국처럼 대출자산 유동화가 실효성 있는 자본관리 수단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의 차이에 있다. 국내는 미국만큼 기업대출 기반의 유동화 시장 자체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국내 ABS 시장은 주로 카드채나 오토론 등 소매금융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기업여신 기반의 유동화는 거래 구조나 투자자 기반 모두 제한적이란 설명이다. 은행이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더라도, 이를 시장에서 받아줄 투자자 풀이 제한적이란 분석이다.
한 시중은행 대기업영업 담당자는 "미국 은행들이 RWA를 낮추기 위해 대출자산을 기반으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사례를 알고 있고, 국내 은행들도 이를 참고해 유동화를 검토하거나 실제 진행하기도 했다"라며 "다만 국내에서는 유동화하더라도 투자자 풀이 거의 없고, 유동화는 증권사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해 성장이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규제 환경도 미국과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는 유동화 과정에서 은행이 일정 수준의 신용보강을 제공하는 경우, 해당 자산이 여전히 은행의 리스크로 간주돼 RWA가 줄어드는 효과가 크지 않다. SRT의 경우엔 국내에서는 법적인 근거와 감독 규정 등이 없어 도입 자체가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수년 전부터 대출유동화와 SRT를 자본비율 관리 수단으로 활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SRT는 최근 글로벌 은행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로, 위험관리와 자산운용 유연성 확보의 도구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다.
물론 SRT 시장이 커지면서 해당 거래가 금융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가령 은행이 SRT를 발행하게 되면, 실제 자본 규모에는 변화가 없는데도 규제자본비율은 늘어 은행의 대출 여력이 부풀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향후 SRT에서 위기가 발생할 경우, 연쇄 위험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일각에선 국내 은행들이 단순히 금융당국에 RWA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 없이 규제만 강화되는 정책 기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처럼 유동화나 위험전이 구조 등 자본관리 수단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 마련을 병행하지 않으면, 현장 부담만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대출을 늘리라는 정책 방향은 분명한데, 자본비율 규제는 그대로 두고 유동화나 위험전이 같은 대응 수단은 막혀 있는 게 현실"이라며 "결국 은행 보고 알아서 버티라는 건데, 이대로라면 대출 확대도, 자본건전성 유지도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