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지옥' 기가팩토리 바닥에서 먹고자던 '창업자모드' 머스크
삼성전자에 효율성 개입 "허락받았다"…파나소닉 설움 예고편?
'AV 피벗' 테슬라에 맞춤형 美 현지 파트너십 자리 확보했지만
파운드리에서도 먹힐까…양사 궁합 어떻게 맞춰질까 설왕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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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sung agreed to allow Tesla to assist in maximizing manufacturing efficiency. This is a critical point, as I will walk the line personally to accelerate the pace of progress. And the fab is conveniently located not far from my house. 😊"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29일 소셜미디어(SNS) 엑스(옛 트위터)에 "삼성이 테슬라의 제조 효율성 극대화 지원을 허용하기로 했다. 꽤 핵심적인 진전이다. 내가 속도를 높이기 위해 현장을 직접 챙길 것이다. 다행히 해당 팹은 집에서 멀지도 않다(웃음)"라고 남겼다.
양사의 영업비밀 보호 계약에도 아랑곳 않고 테슬라와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협력을 '개인적으로' 예고한 것이다. 이렇다 할 수주가 없어 미국 테일러 팹(Fab)을 가동할 수 있을지, 앞으로 적자는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하던 삼성전자와 협력사 드잡이질로 유명한 테슬라의 궁합을 두고 여러 전망이 오르내린다.
2. 2020년 9월, 일론 머스크는 '배터리데이' 행사를 열고 배터리 셀 디자인과 생산 공정, 양·음극재 물성과 차체 구조에 대한 5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18개월 안에 이를 달성해 비용구조를 kw당 56% 절감하겠다는 목표를 내놨었다.
당시 시장에선 ▲배터리 셀까지 자체 생산해서 수직계열화를 마치겠다는 메시지라거나 ▲원통형 배터리를 중심으로 전기차 시장의 업계 표준을 제시한 것이라는 등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끈 건 '일론 머스크가 협력사를 대놓고 압박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답답하니 내가 길을 제시해준다' 하는 식으로.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테슬라가 협력사 다루는 방식이나, 현재 46사이즈 원통 배터리 채택률을 보면 수직계열화, 표준 제시도 맞는 분석이지만 압박처럼 느껴진 면이 있다"라며 "전기차 전환을 가속해야 하는 타이밍에 배터리 공급이 병목이 되면 안 된다고 고객사 CEO가 직접 행사를 열고 방향성을 제시한 건데, 공급사 입장에선 공개 저격이다"라고 말했다.
3. 이런 설움으로 가장 유명한 기업이 일본 파나소닉이다. 파나소닉은 테슬라가 기가팩토리 초기 '생산지옥'을 겪던 시절부터 고락을 함께 해온 핵심 파트너사로 꼽힌다. 당시 머스크는 모델 3 생산 목표치인 주당 5000대를 맞추기 위해 미국 프리몬트 공장 바닥에서 먹고 자며 "생산지옥을 견디고 있다"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듬해 하반기 테슬라는 마침내 기가팩토리 양산 체계를 안정화하고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파나소닉은 다음과 같이 내부 사정을 본국 언론을 통해 전달했다. ▲"일론 머스크는 협업하기 어려운 인물이고, 테슬라의 공격적인 속도와 일방적인 요구가 내부에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협력하지 않는다. 명령한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파나소닉이 다시는 테슬라랑 일하지 않겠다거나, 나가는 엔지니어들이 많다는 식의 얘기는 거의 매년 나왔다"라며 "일하는 방식을 보면 파나소닉이 학을 떼더라는 말이 납득이 갈 것이다. 공급사 제품을 뜯어보고 직접 개선 방안을 제시하고 못 해오면 압박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이다"라고 전했다.
일론 머스크의 이런 면모는 소위 '창업자 모드(Founder Mode)'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창업가 겸 투자가 폴 그레이엄 표현에서 따온 말로 '조직 관리자가 되기 전 문제 해결과 제품 성장에 CEO가 온몸을 갈아넣는 상태'를 가리킨다.
4.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165억달러(원화 약 22조7647억원) 규모 반도체 위탁생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하자마자 머스크가 "현장을 직접 챙기겠다"라고 한 장면은 업계에서 어떻게 읽히고 있을까.
우선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삼성전자의 절박함이 거론된다. 5년 동안 수십조원을 쏟아부었는데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지 못했다. 캡티브(내부 매출)까지 쪼그라들면서 1분기 기준 시장 점유율은 7%대까지 하락한 상태였다. 이대로면 매 분기 2조원 안팎의 적자가 계속될 텐데,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현금 창출력은 전만 못하다. 내년 테일러팹을 가동하면 과연 적자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테슬라에 '효율성 극대화 지원'을 허용하고 막대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 출신 한 관계자는 "공정 전문가들이나 재무담당 같은 관리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고객사 니즈를 피부로 느끼는 엔지니어들의 역할이 많이 축소된 것이 파운드리 실패 원인이라는 내부 반성이 많았다"라며 "그 콧대 높던 삼성전자가 고객사 개입을 허락했다는 측면에서 절박함이나, 작년 연말 인사 이후 바뀐 분위기가 감지된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머스크의 의중에 대한 분석들이다. 머스크는 2년여 전 전기차 전환 가속 대신 로보택시와 휴머노이드 로봇을 앞세워 인공지능(AI) 기반 자동화기기 플랫폼으로 전환을 추진해왔다. 작년부터는 중국 현지에 묶인 전기차 주행 데이터 확보와 엔비디아 가속기(GPU) H100 수조원어치 구입을 추진하는 동시에 차세대 반도체 설계를 병행해왔다. 다음 스텝을 밟을 타이밍에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찾은 셈이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머스크는 이전에도 엔비디아 제품을 쓰다가 직접 자율주행(FSD) 칩과 슈퍼컴퓨터용 GPU를 설계해서 쓰다가 하는 식으로 전환을 반복해왔다"라며 "테슬라는 이미 AI 쪽으로는 가속기부터 슈퍼컴퓨터 설계, 자체 데이터센터 인프라 셋업, 전기차, 로봇에 쓰이는 개별 칩까지 내재화를 마친 상태다. 삼성전자가 여기에서 현지 생산 파트너로 합류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삼성전자에 맡길 물량은 차세대 FSD 칩인 HW 6.0(AI6)과 도조(Dojo) 확장에 쓰일 D2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래도 대만 TSMC 외에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일부 물량을 맡겨 왔지만, 이번에는 삼성전자의 테일러팹이 초반부터 테슬라 미래 두뇌를 만들 핵심 파트너로 공표됐다.
5. 여러모로 삼성전자가 상당히 버겁고 험난한 기회를 잡았다는 관전평이 적지 않다.
일단 테슬라에 필요한 반도체와 IT 부품군은 삼성전자를 위시한 그룹사가 대부분 공급 가능한 상태다. 파운드리가 생산할 AI6, D2 등 고부가 로직 반도체 외에 고대역폭메모리(HBM)부터 이미지센서(CIS)나 디스플레이, 배터리까지 전장 부품 전반에서 협력 확대가 가능하다. 향후 로보틱스와 전기차, AI 시장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애플과 TSMC 협력 규모와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머스크가 AI 산업을 선도하는 몇 안되는 CEO 중 하나이고 팹리스 영역에서 세계 최고의 두뇌를 이끌고 발군의 성취를 이뤄왔다는 점도 기대감을 키운다. 파운드리 사업의 성패는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팹리스 고객과 긴밀히 협업하는 데서 가려진다는 분석이 많다.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대형 고객 수주에서 오랜 기간 헤매왔던 만큼 이번 기회로 상당한 노하우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머스크의 '창업자 모드'를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시각과 함께 머스크의 방식이 반도체 산업에서도 통할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2나노미터(nm) 선단공정 파운드리 팹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작업은 배터리 셀이나 전기차 양산체계를 안정화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영역으로 통한다.
개별 공정마다 극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고 원자 단위 결함도 최종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산업인 만큼 머스크의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더군다나 머스크는 협력사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공공연하게 저격하고 비난하는 등 튀는 행동으로 정평이 나 있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내 역할을 공식적으로 끝내자마자 감세 법안을 두고 "역겹다"라고 저격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못마땅함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지 말란 법이 없다.
시장 한 관계자는 "파운드리가 수주 산업인 만큼 테슬라도 엄연히 고객사 중 하나일 뿐이고, 테슬라도 삼성전자가 안 되면 TSMC를 찾아갈 수 있는 구도"라며 "더군다나 배터리처럼 재료비만 60~70%를 차지하는 저마진 제조업 효율을 극대화하는 걸 파운드리랑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테슬라가 가뭄에 단비이긴 한데 궁합이 어떨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