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 과제 직면...정치권·당국 압박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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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이 ‘밸류업(Value-up)’ 정책과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두 가지 과제에 동시에 직면했다. 그간 관행처럼 받아들여졌던 회계처리 방식이 밸류업 정책 기조 속에서 문제로 부각되며, 보험계약자 권익 논란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회계 해석을 넘어,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금감원, 이찬진 원장 취임 이후 삼성생명 회계 관련 첫 움직임
금융감독원은 21일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 회계학과 교수 등이 참석하는 비공개 간담회를 열고 삼성생명의 회계처리 방식에 대한 업계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다. 지난달 간담회를 통해 삼성생명의 회계처리 방식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한국회계기준원은 일단 참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움직임은 삼성생명 회계처리 이슈가 수면 위로 불거진 후 '열쇠'를 쥐고 있는 금감원의 첫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다. 금감원은 현재 삼성생명 회계처리의 기준이 되고 있는 2022년 질의회신문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3년 사이 새 회계기준이 전면 적용되고,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일부 지분 매각ㆍ삼성화재 자회사 편입 등의 이슈가 있었던만큼 이전의 기준을 계속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이번 간담회는 실무적인 차원의 간담회로 파악된다. 금감원이 방향성을 결정하는 자리라기보단 지난 14일 부임한 신임 이찬진 금감원장에게 쟁점과 업계 목소리를 정리해 전달하려는 목적이란 것이다. 이 원장은 지난 18일 처음 출근해 부서별 업무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삼성생명 관련 논란에 대해서는 아직 이 원장에게 구체적인 보고가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토론회서 회계처리 문제 집중 제기
이번 논란은 이미 회계기준원을 넘어 국회로 점화된 상황이다. 지난 18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토론회에는 더불어민주당 김남근·박홍배·이강일·이정문 의원과 시민단체 경제민주주의21이 참여했다. 주요 쟁점은 ▲삼성화재 자회사 편입 후 지분법 미적용 ▲유배당보험상품의 ‘계약자지분조정’ 항목 처리 방식이었다.
삼성화재가 밸류업 차원에서 자사주를 소각하면서 시작됐다. 이로 인해 삼성생명의 삼성화재 지분율이 15%를 넘어서면서 자회사 편입 요건을 충족했지만, 삼성생명은 지분법이 아닌 단순 금융자산 회계처리를 택했다. 이에 대해 “자기 유리한 해석”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문제는 삼성전자로 확산된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자사주를 소각한 뒤 삼성생명·삼성화재의 전자 지분율은 각각 10%를 넘어섰다. 금산분리 규정에 따라 일부 지분 매각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삼성전자 지배구조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
더욱이 삼성생명이 과거 유배당 보험계약자의 보험료로 삼성전자·삼성화재 지분을 매입했음에도, 그 이익이 계약자가 아닌 회사와 대주주에게 귀속돼 온 점은 계약자 권익 침해 논란을 불러왔다. ‘계약자지분조정’ 항목이 부채로 분류되지만 실제 계약자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비자단체는 “실질적 권리 침해”라고 주장한다.
‘삼성생명법’ 정당성 재부각...지배구조 파장 확대
이 같은 논란은 국회에서 수년간 계류 중인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에 다시 힘을 싣고 있다는 평가다. 개정안은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채권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고, 총자산의 일정 비율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삼성생명은 총자산의 30% 이상을 삼성전자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어, 법안이 통과될 경우 대규모 지분 매각이 불가피하다. 과거에는 “이재용 회장의 지배력 약화”와 “시장 충격”을 이유로 반대 여론이 컸지만, 최근에는 밸류업 정책 기조와 맞물려 “지배구조 투명성 확보 없이는 한국 증시 체질 개선이 어렵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을 단순한 회계 논쟁으로 치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밸류업 정책, 소비자 권익, 지배구조 투명성이 얽혀 있어 정치권의 압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아직 삼성생명법 도입이 민주당의 당론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이전 국회때도 민주당에서 추진했던 법안인데다,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연합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만큼 본회의에 올라갈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란 평가다. 신임 이찬진 원장과 이재명 대통령의 관계가 지난 정부 초기 윤석열 대통령-이복현 금감원장보다도 '끈끈한 사이'라는 관전평이 나오며, 대통령실의 의중 역시 변수가 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많다.
김남근 의원은 “삼성생명이 보험 계약자들의 자금으로 삼성전자·삼성화재 등 계열사 지분을 매입해 그룹 지배구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온 문제가 계속 지적되고 있다”며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가 계약자 보호 측면에서 적극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국회 관계자도 “삼성전자 지분가치를 높이려면 삼성생명 지분 처리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며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가치 상승으로 계열사 지배구조 정비가 오히려 시장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