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처리한 여당의 다음 타깃은 자사주 제도…자사주 쌓아둔 대기업들 초긴장
입력 2025.08.27 07:00
    다음달 국회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
    롯데·SK 등 多보유 기업 지배구조 압박
    두산·LS·신세계, 선제적 소각으로 대응
    IT·금융권은 활용도 제한 우려 높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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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를 담은 '더 센 상법'이 지난 25일 국회를 통과한 직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다음 타깃을 공개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핵심으로 하는 3차 상법 개정안이다. 오기형 민주당 코스피5000특위 위원장은 상법 통과 당일 "3차 상법의 출발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라며 9월 정기국회에서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범여권 의원들이 발의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 5건이 계류 중이다. 각 법안마다 소각 시점이 다르다. 김현정 의원안은 '취득 즉시', 김남근·민병덕 의원안은 '1년 이내', 이강일 의원안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간 내' 소각을 규정했다. 조국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6개월 이내' 소각안을 내놨다. 업계에서는 김남근안의 '1년 유예'가 현실적인 타협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사주 소각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도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된 바 있으나 기업 반발과 정치적 부담으로 흐지부지됐다. 이번 개정 논의가 다른 점은 정부여당이 상법 전면 개정을 통해 이미 '기업 지배구조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재계 반발을 감수하더라도 강행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의지가 과거와는 뚜렷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5년 6월 기준 상장사의 68.7%가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고, 이 중 236개사(9%)가 10% 이상을 보유 중이다. 이들 기업 중 상당수가 소각 의무화 시 지배구조와 경영 전략에 근본적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직접적 타격을 받을 것은 지주회사들이다. 롯데지주는 32.51%로 20대 그룹 중 가장 높은 자사주 보유 비중을 기록하고 있다. SK㈜도 24.8%에 달한다. 일부 기업은 그동안 자사주를 경영권 안정화 핵심 수단으로도 활용해왔는데, 소각 의무화 시 지배구조 재편 압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15% 이상 보유 기업도 117개사에 달해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입법 전 정치적 압박만으로도 상당수 기업이 이미 대규모 자사주 소각에 나서고 있다. 두산은 가장 적극적인 사례다. 현재 17.9% 보유 중인 자사주를 2027년까지 10% 이하로 낮출 계획을 세웠다. 99만주(6%)는 매년 33만주씩 3년간 소각하고, 8만7000주(3%)는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으로 처분할 예정이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도 올해 상반기 RSU 1만9152주를 부여받는 등 임직원 보상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LS도 이달 첫 소각을 단행했다. 2008년 지주사 체제 전환 후 첫 자사주 소각으로, 100만주(3.1%, 1712억원) 규모다. 올해 50만주, 내년 1분기 50만주를 나눠 소각한다. LS는 호반그룹과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자사주를 담보로 한진그룹에 650억원 교환사채(EB)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번 소각으로 추가 지분 매입 부담을 높일 수도 있다. 

      신세계그룹도 남매 경영 체제 하에서 각각 다른 소각 전략을 펼치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이끄는 이마트는 2026년까지 보유 자사주(2.9%)의 50% 이상을 소각할 방침이다. 정유경 ㈜신세계 회장은 3년간 매년 2% 소각을 통해 9.09% 보유 비중을 대폭 낮출 계획이다.

      IT 대기업들은 이미 선제 대응을 완료해 상대적으로 안정권에 진입했다. 네이버는 현재 8% 보유 중인 자사주를 2025년까지 5% 이내로 낮추겠다고 공약하고 연간 소각을 시행하고 있다. 카카오는 2021~2023년 3년간 5300억원을 소각해 대부분 정리를 마쳤다.

      게임기업 중에서는 엔씨소프트가 다소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 엔씨소프트는 자사주 10% 유지를 목표로 하면서 "소각 대신 향후 인수합병 용도로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소각 의무화가 현실화되면 그간 준비해온 M&A 전략에 적지 않은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IT기업들의 경우 임직원 보상이 자사주 처분의 64.8%를 차지하는 만큼, 예외 조항으로 상당 부분 보호받을 수 있다. 다만 글로벌 인재 확보 경쟁에서 스톡옵션 등 주식 보상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매번 신주 발행 절차(2~3개월 소요)를 거쳐야 하는 부담은 남는다.

      제조업과 전통 산업 기업들은 경기 순환에 따른 유연한 자금 운용 도구를 잃게 되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경기 호황기에 자사주를 취득해두었다가 불황기에 활용하는 전략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업계처럼 경기 변동성이 큰 업종은 특히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업도 마찬가지다. 은행권은 BIS 자기자본비율 조정 수단으로, 보험사는 자본 효율성 관리 도구로 자사주를 활용해왔다. 시장에서는 소각 의무화 시 금융사들이 재무 관리의 유연성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제도 변화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 흐름과도 맞물린다. 국민연금은 올해부터 의결권 행사 강화와 주주환원 정책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있어, 자사주 소각은 기관투자자들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 주주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잦았던 만큼, 이번 개정이 장기적으로는 국내 자본시장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면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이달 국회 자사주 제도 토론회에서 "유연한 자금운용 보장과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을 통한 보완 조치가 동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계는 포이즌필 도입, 배임죄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여당 내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급격한 제도 변화에 대한 우려도 상존한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경영계 반발과 주식시장 하방 압력 우려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나오고 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는 9월 정기국회는 재계에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선제적으로 대응한 기업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여전히 과다 보유 상태인 그룹들은 지배구조 재편과 경영권 방어 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자사주 과다 보유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경영권 불안정성 증가"라며 "소각 의무화 시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