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V 통한 비용 분담…인력 조정 갈등까지 나눠지려 할까
재무위기 시급한 곳 아니면 현 인센티브 구조 한계 뚜렷
이미 10개사 분위기 천차만별…더 적극적 개편안 내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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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석유화학 구조 개편안에 민간이 자율적으로 참여할 유인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선(先)자구노력, 후(後)정부지원' 방침을 세워뒀으나 납사분해설비(NCC)를 보유한 10개사 사정이 제각각이라 급하지 않은 기업들은 여전히 득실을 따지고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현재 대산 산업단지에 위치한 NCC를 포함해 대산 공장 전체를 HD현대오일뱅크에 출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양사 합작법인(JV)인 HD현대케미칼에 대산공장 전체를 넘기고 HD현대가 증자를 통해 지분율을 조정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LG화학 역시 GS그룹과 유사한 논의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가 목표를 제시하고 민간 자율적으로 자구안을 짜내는 수순으로 보이지만 한 발짝 더 들어가면 여전히 성사 가능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정유사가 NCC 폐쇄(스크랩)로 인한 손실을 어떻게 나눠질지 구체적인 방법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증권사 화학담당 한 연구원은 "정유사도 어차피 계속해서 다운스트림(석유화학)으로 수직계열화를 넓혀야 하니 NCC를 싸게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는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라며 "그러나 가격 문제에서 합의도 어려울 테고 정유-석화 수직계열화를 넘어 최종적으로는 설비를 줄여야 할텐데 이걸 어떻게 유도하겠다는건지 디테일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3대 산단에서 십시일반으로 최대 370만톤을 줄이자는 건데 결국 폐쇄해야 하는 설비는 화학사들이 오래 굴려온 노후 공장들이다. 정유사들은 비교적 최근 NCC에 직접 진출한 만큼 투자 회수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감축에 동참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체 발생하는 납사를 소화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비를 고도화해온 만큼 산업 전체의 경쟁력 측면에서도 화학사들의 NCC가 감축 우선순위에 오르는 게 맞는다는 분석이 많다.
화학사들도 섣불리 설비를 폐쇄하거나 헐값에 넘기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잠재 대상으로 거론되는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115만톤), 여수NCC의 1공장(90만톤), SK지오센트릭(66만톤) 등은 노후하긴 해도 규모나 경쟁력에서 차이가 있다. 각기 위치한 산단의 사정이나 모회사 재무 여력도 다르고 JV 파트너십을 구했느냐에 따라 감내해야 하는 손실도 달라진다. 공급과잉을 해소해야 업계가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고통을 십시일반 나눠지는 것이 불가하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게 복잡한 만큼 정유사와 화학사가 JV를 통해 구조조정 비용을 나눠지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노후 NCC도 계속해서 증설과 유지보수에 비용이 투입된 만큼 여전히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 장부가치가 남아 있다. JV를 꾸리면 설비 폐쇄에 따른 손실 절반은 정유사가 부담해야 하는데, 화학사들이 이를 메워줄 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룹사 오너 간 대승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다음에야 실무적 합의점을 찾는 게 만만치 않을 거란 평이다.
다른 한 연구원은 "스크랩할 때 장부 충격도 문제지만 추후 인력을 정리할 때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런 부담까지 나눠지고 싶어 하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며 "정유사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이유가 안 보이는데, 실제로 협상 중인 정유사들의 얘기도 제각각"이라고 말했다.
정부 인센티브 설계 역시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마땅한 자구안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금융지원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게 주 내용인데, 당장 재무위기가 코앞인 경우가 아니라면 참여할 유인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롯데케미칼이나 SK지오센트릭은 이자비를 줄이고 신용등급을 방어하면서 차환 일정을 대비해야 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협상 상대인 HD현대오일뱅크나 대한유화, S-오일 등은 금융 지원이 시급한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 대한유화의 경우 선제 구조조정 효과가 드러나면서 숨통이 트이고 있는 참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인센티브 구조에선 협상 테이블이 차려져도 눈높이를 맞추기 어려운 분위기가 전해진다.
최대 설비를 보유한 LG화학은 구조조정이 필수적인 업체로 꼽히지만 올해 비주력 자산 매각으로 이미 상당한 유동성을 확보했다. 조만간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 지분까지 유동화하고 나면 어느 정도 급한 불을 끄게 될 거라는 관측이 많아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올까 하는 시선이 많다. 반대로 유동성 위기가 한창인 여천NCC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합치하기 전까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곳으로 분류된다.
28일 삼일PwC도 일본 석유화학 구조조정 사례를 기반으로 현금성 지원이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공급과잉을 해소하려고 자산을 처분, 합병할 때에는 법인세나 취득세 전액 감면과 같은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이미 몇몇 업체에서는 비교적 느긋하게 경쟁업체 협상을 지켜보겠다는 의중이 파악된다. 관련 법 개정이 이뤄지지도 않았고, 도산하는 기업이 나오는 게 차라리 현실적 수순이란 분위기도 여전히 깔려 있다"라며 "배임 논란을 고려하면 정부가 행정적으로 압박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좀 더 제대로 된 개편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