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규모 최대치인데…제도 개편 두고 금감원 vs 노동부 '엇박자'
입력 2025.09.03 07:00
    취재노트
    '432조' 퇴직연금 시장, '안전자산 30%' 규제 개편 논의 지지부진
    수익률 제고 필요성 vs 원금 손실 우려…당국 신중론 속 조율 난항
    1000조 시장 앞두고 업계 "투자자 선택권·제도 신뢰 흔들려"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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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은 432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제도 개편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규제 완화를 통해 수익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근로자의 원금 보호와 안정성을 앞세우며 보수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수익성 확대'와 '안정성 보장'이라는 정책 철학이 충돌하면서 퇴직연금 제도 개선은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 자체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적립금은 2023년 380조원에서 지난해 432조7000억원으로 늘었고, 매년 평균 30조원 안팎의 증가세가 이어진다. 금융투자업계는 2045년이면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커지는데 수익률은 여전히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구조적 한계가 반복된다.

      문제의 출발점은 퇴직연금 위험자산 규제 구조다.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는 원칙적으로 70%(위험자산) 대 30%(안전자산) 규제를 적용받고, DC·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에서는 국내 상장주식 직접 투자가 금지돼 있다. 

      결과적으로 근로자들의 선택지는 좁고, 원리금보장 상품에 자금이 몰릴 수밖에 없다. 실제 전체 적립금 가운데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80%를 웃돌고, 최근 10년간 연환산 수익률은 실적배당형 3.44%, 원리금보장형 2.09%에 그쳤다.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수익률이다.

      금융당국은 이런 구조를 손보지 않고서는 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어렵다고 본다. 금융감독원은 DC형·IRP의 위험자산 한도 폐지와 국내 상장주식 투자 허용을 추진 중이다. 금감원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의 저조한 성과는 지나치게 보수적 운용에서 비롯됐다"며 "자기주도적 투자자에게까지 일률적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한 족쇄"라고 말했다. 

      이어 "저출산으로 국민연금은 장기적으로 매도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고, 국내 자본시장 수급 불안은 불가피하다. 퇴직연금이 1000조원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만큼 투자 다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반면 노동부는 신중론을 유지한다. 노동부 퇴직연금 부문 관계자는 "수익률 제고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그로 인한 원금 손실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며 "퇴직연금의 본래 목적은 근로자의 노후소득 안정성 보장"이라고 말했다. 

      특히 "규제를 풀어도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도 지적했다. 실제 위험자산 투자 한도가 60%에서 70%로 확대됐지만, 근로자들은 여전히 예금·보험 등 원리금보장 상품을 선호해 제도를 바꿔도 시장 구조가 쉽게 달라지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양 당국 간 시각차는 퇴직연금을 둘러싼 현실 문제로 이어진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2023년 전면 시행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다. 제도 도입 취지는 투자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퇴직연금이 자동으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배분되도록 해 수익률을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가입자 10명 중 9명은 예금, 보험계약 등 초저위험 원리금보장 상품을 선택했다. 고금리 환경이 겹치면서 초저위험 등급 수익률은 4%대를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중위험·고위험 상품은 10~14%의 수익률을 올렸다. 투자업계에서는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성을 개선하겠다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미국, 호주 등 주요국은 디폴트옵션을 TDF(Target Date Fund) 같은 실적배당형 상품 중심으로 설계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을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이를 바꾸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은행권의 강한 이해관계도 제도 개선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TDF 시장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적격 TDF 상품이 사실상 S&P500 등 특정 지수에 과도하게 편중되면서 주식 비중이 80~90%까지 치솟은 사례가 확인된 것이다. 생애주기별 자산배분이라는 TDF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부가 적격 TDF 요건에서 ETF를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배경도 이 때문이다. 

      다만 업계는 "이는 제도 설계 해석의 문제일 뿐, 상품 구조상 ETF와 공모형 TDF는 동일하다"며 반발한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단순히 상장 여부만으로 차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업계 전반에서는 금융당국과 같은 기조로 규제 완화 필요성을 강조한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계좌의 투자 규제 수준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멀다"며 "미국 401(k)나 호주 슈퍼애뉴에이션은 위험자산 한도 자체가 없다. 지금 같은 제도로는 수익률 개선도, 시장 활성화도 어렵다"고 말했다. 

      또 업계 관계자는 "연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을 밑돈다면 제도 자체가 노후소득 보장 취지를 달성하지 못하는 셈"이라며 "투자자 선택권 확대와 제도 신뢰 제고 없이는 퇴직연금이 자본시장의 '마지막 큰손' 역할을 하긴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