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펀드레이징 시장 '물꼬' 터졌지만…여전히 '기대 반 불안 반'
입력 2025.09.09 07:00
    대형사 빠진 공백기…중견·신생 GP에 기회
    군인공제회, 출자 규모 확대…중소형 GP 문턱 낮춰
    노란우산·과기공·사학연금까지 가세…출자 러시 본격화
    정책형 자금도 합류…AI·첨단산업 투자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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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 하반기 출자사업 시장이 장기간의 침체를 뒤로하고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행정공제회를 비롯해 군인공제회, 노란우산공제회, 과학기술인공제회 등 공제회와 연기금들이 잇따라 출자사업에 나섰고, 성장금융과 산업은행과 같은 정책형 자금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돈줄'이 열리자 얼어붙었던 펀드레이징 시장에 숨통이 트이는 모양새다. 

      하지만 동시에 대형 PEF가 빠진 공백, 특정 테마로의 쏠림, 치열한 경쟁률은 업계의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형사 빠진 빈자리, 중견·신생사 '찬스'

      가장 눈에 띄는 건 행정공제회의 움직임이다. 행정공제회는 2019년 이후 사실상 중단했던 PEF 블라인드 출자를 6년 만에 재개했다. 총 2000억 원을 4곳에 배정하고, 별도로 1500억 원 규모 공동투자(Co-invest) 펀드도 동시에 운용사를 선정한다. 그간 리업 중심으로만 출자를 이어오다 빈티지 분산 필요성이 커지자 공모 방식을 다시 열었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스틱인베스트먼트 등 대형 하우스들이 신규 펀드 결성을 마친 상태라 이번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형사들이 빠지면서 중·소형 GP에게 사실상 '열린 무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군인공제회는 출자 규모를 4800억 원까지 늘렸다. PEF 3400억, VC 1400억을 각각 10곳 운용사에 배분한다. 선정 GP 수가 지난해 17곳에서 20곳으로 늘었고, 펀드 최소규모 요건도 PEF 1000억 원, VC 400억 원 수준으로 완화됐다. 

      작년까지 존재했던 대형·중형 리그 구분도 사라졌다. 사실상 중소형 GP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겠다는 신호다. 다만 국방 산업 관련 투자 이력에는 가점을 줘 공제회 특성을 반영했다. 업계에서는 "군인공제회가 중형GP를 겨냥해 출자를 진행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란우산·과기공에 사학연금까지 가세

      노란우산공제도 VC와 PEF 모두에서 큰손 역할을 예고했다. VC에만 1800억 원을 배정해 일반·소형 리그로 나눠 11곳 GP를 뽑는다. 현재 PEF 출자도 검토하고 있는데 규모는 5000억 원 안팎으로 거론된다. 지난해 4700억 원보다 늘어난 규모다. 대형 PEF들의 신규 펀드레이징이 주춤한 반면, 수천억 원대 중형 펀드들이 시장에서 주류로 떠오른 흐름을 반영한 것이란 평가다.

      과학기술인공제회 역시 3100억원 규모의 출자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루키리그'를 부활시켜 신생·소형 운용사에도 문호를 연다. 과기공은 상반기 크레딧 펀드 출자에서 4.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만큼 운용사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하반기에는 PE와 VC를 각각 3~4곳씩 선정할 것으로 보인다.

      사학연금도 출자시장에 돌아올 전망이다. 작년에는 예산 문제로 VC 출자를 쉬었지만, 올해는 다시 출자하기 위해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에는 운용규모(AUM) 1조 원 이상 대형 VC만 GP로 선정했지만, 최근에는 AI 등 전략분야를 강조하고 중견사에도 기회를 열어주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사학연금이 본격적으로 출자를 재개하면 업계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 정책자금도 '가세'…AI·콘텐츠 테마 부상

      정책형 자금도 출자시장 분위기를 달구고 있다. 성장금융은 상반기에만 8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집행하며 딥테크와 기후금융, 반도체, 콘텐츠 등 전략산업 출자에 힘을 싣고 있다. 현재 기술혁신전문펀드6호 위탁운용사 선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첨단제조AI와 반도체 및 핵심소재, 바이오, 유통산업혁신 등이 주요 분야다.

      산업은행도 최근 '2025 AI 코리아 펀드' 위탁운용사 선정을 마쳤다. 이번 출자사업은 산은이 3년간 총 1조5천억원 규모로 조성 중인 'AI 코리아 펀드' 출자사업의 2차년도 사업이다. 이를 통해 AI밸류체인 전반에 모험자본을 공급할 예정이다. 현재는 남부권 지역성장지원펀드 출자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 숏리스트를 발표했다.

      AI는 사실상 모든 제안서의 필수 요소가 됐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AI 파이프라인을 담지 못하면 사실상 심사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콘텐츠 분야 역시 정부의 지원 기조에 힘입어 LP와 GP 모두가 주목하는 테마다. 다만 지나친 테마 쏠림이 자칫 투자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동시에 제기된다.

      승자독식 흐름도…KCGI 이어 '아주IB투자'도 두각

      이 가운데 '출자를 받는 곳이 계속 받는', 승자독식의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강성부 펀드로 불리는 KCGI는 올해에만 교직원공제회·새마을금고·성장금융·신협중앙회 등 출자사업에서 연이어 GP 자격을 확보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VC에선 아주IB투자가 올해 주목할 만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신협중앙회, 교직원공제회, 성장금융의 은행권 밸류업펀드 GP로 선정되며 5000억 원 이상 펀드 결성을 추진 중이다. 이에 지난달에는 GP커밋(운용사 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67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기도 했다.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는 하반기

      하반기 출자시장은 자금이 쏟아지며 활기를 되찾았지만, 그만큼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초대형 PEF들이 빠진 공백은 중견·중소형 GP들에겐 절호의 기회지만, 반대로 경쟁률은 높아지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한 부담도 커졌다. LP 입장에서도 정책 기조와 산업 전략에 맞는 테마 투자가 필요하지만, 특정 분야에만 쏠릴 경우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한 중견 운용사 관계자는 "자금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업계에 모처럼 활기가 도는 건 사실이지만, 경쟁률이 높아져 '승자독식' 양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크다"며 "하반기 성적표가 내년 이후 펀드레이징 판도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