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단체교섭·노무 대응 인력 대거 충원
보좌관 출신 대관 법인·위기관리 PR사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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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입법 리스크가 기업 경영을 흔드는 무게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상법 개정으로 최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장치가 약화된 데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노조법 개정(일명 노란봉투법)으로 원청 기업의 책임 범위가 대폭 늘어난 것도 큰 변수가 됐다. 여기에 김건희 특검 논의 등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주요 기업들은 "하루아침에 게임의 룰이 바뀔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체감하고 있다.
최근 채용 공고만 봐도 변화의 흐름이 감지된다. 쿠팡 계열사들은 이달 단체교섭 및 노동조합 대응이 가능한 노무 담당 경력직들을 채용하고 있다. 한화오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한화 계열사들은 노무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인력들을 모집 중이다. 삼성그룹과 SK그룹도 각 계열사별로 노무 관리 담당 포지션을 찾고 있다.
카카오뱅크, 카카오엔터프라이즈, NHN, CJ대한통운, LS일렉트릭 등도 최근 수개월간 유사한 채용을 내놨다. 공통적으로 단체교섭, 노동조합 대응, 집단적 노사관계 전략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한다. 단순히 인사·노무팀의 충원이 아니라, 입법 변화와 분쟁에 직접 대응할 수 있는 실무자와 전략가를 동시에 찾는 것이다. 기업 내부 노무 라인을 두텁게 구축해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법무실과 노무팀의 위상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에는 로펌과 협력해 분쟁을 법률적으로 대응하는 법무실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노무팀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한 대기업에서는 노무 담당 부서를 격상시키고, 경영진 회의에도 노무사를 정기적으로 배석시키는 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노사관계와 단체교섭 이슈가 단순한 인사 관리 차원을 넘어 경영 리스크로 직결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로펌과 노무법인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김앤장, 세종, 광장 등 대형 로펌들은 최근 노무·대관 융합 TF를 만들고, 노조 이슈를 통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형 로펌은 여전히 소송과 자문에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입법 변화가 예측 불가능하게 이어지면서 단순한 법률 검토로는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견 노무법인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일부는 기업 전담 대관 TF를 꾸리며 보좌관 출신 컨설턴트를 영입해 인력 풀을 확장했다. 노무·대관 이슈를 한데 묶어 다루는 '원스톱 서비스'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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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치권 인맥을 앞세운 보좌관 출신들의 '대관 창업'도 늘고 있다. 과거에는 로펌이나 대기업 법무실에서 네트워크 담당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아예 별도 법인을 세워 시장에 뛰어드는 흐름이다. 지난해부터 여의도에는 국회 보좌진 출신이 주도하는 대관 전문 회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정 기업에 종속되지 않고, 복수의 기업과 계약을 맺으며 국회·정부·시민단체를 아우르는 종합 대관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타트업·중견기업이 주요 고객이다. 한 대기업 대관 관계자는 "법안 하나로 사업모델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시점에서 대관은 결국 보험과 같다"고 말했다.
홍보(PR)업계도 변하고 있다. 에스코토스컨설팅, 스트래티지 샐러드 등 일부 대행사들은 '위기관리 전문 회사'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입법 리스크 대응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전통적으로 언론 대응에 집중하던 홍보 회사들이 이제는 국회 일정·청문회 대응까지 패키지로 제안하는 모습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법률 해석과 소송 대응보단 지금은 정치권·여론 지형을 실시간으로 읽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며 "단순히 방어가 아니라, 사안이 커지기 전에 대응 전략을 짜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그룹은 대관팀 자체를 손보고 있다. 기존에는 여당 담당팀, 야당 담당팀으로 이원화해 운영했지만, 최근에는 대관 헤드를 중심으로 이를 통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국 변동성이 커진 만큼, 특정 정당에 과도하게 기울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플랫폼 기업들도 잇달아 보좌관 출신을 영입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쿠팡은 대통령실·국회·공정위 출신을, 배달의민족은 을지로위원회와의 갈등 경험을 고려해 야당 보좌관 출신을 각각 데려왔다. 넥슨 역시 게임 규제·상속세·노조 문제를 동시에 고려해 여당 보좌관 출신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관은 이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투자업계에서도 "대관 업무는 펀드 리스크 관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글로벌 사모펀드(PEF)들조차 대행사에 "국회 대응까지 가능하냐"고 묻는 사례가 늘었다. 대형 PEF들은 보좌관 출신 인재를 직접 찾고 있다. 투자 기업이 노란봉투법이나 자사주 규제 같은 이슈에 휘말리면 펀드 전체 수익률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PEF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인수금융이나 세제 혜택 같은 재무적 이슈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노사·입법 리스크가 더 큰 변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입법 리스크는 더 이상 일부 업종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산업 전반의 경영 전략을 흔드는 변수로 자리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시장에서는 법·노무·대관이 맞물린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는 모습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여의도와 기업 사이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