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하반기 인사 난이도 역대 최악…통상·노무·재무·전략까지 풀라인업 대책 필요
입력 2025.09.11 07:00
    통상대응에 노사갈등까지 국내외서 동시다발 리스크 발생
    기존 관행 안 먹히고 해결사 한둘로는 종합대응 어렵단 평
    8월부터 조기 인사·지배구조 개편까지 치른 한화·HD현대
    사업재편 SK·LG부터 승계 중 롯데·CJ·신세계까지 인사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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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대기업들의 올해 하반기 인사가 전에 없던 고민을 낳고 있다. 밖으로는 통상 압박이 거센데 안으로는 법제 리스크가 쏟아지며 단순하게 긴축이나 쇄신, 안정을 택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강해진다. 현안은 제각각이고 대외환경은 수시로 변하고 있어 어느 장단에 맞출지 혼란스럽다는 평이 많다. 통상 대응부터 노사관계 조율, 사업 재편까지 물샐틈없이 진용을 갖춰야 한다는 전망이다.  

      이달 초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현장에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들이닥치며 한국인 300여명이 구금됐다. 해당 공장은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양사가 6조원을 투자해 짓는 핵심 공급기지다. 내년 초 상업 가동이 목표였으나 단속으로 공사가 중단되며 비자 문제가 뒤늦게 부상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뉴저지주에 개설한 북미법인 신사옥을 둘러보고 미국 정부의 관세 대응부터 사업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방위 관세를 부과하는 동시에 중국 반도체 공장으로의 장비 반입 허가 문제까지 다시 들여다보면서 현지 대응이 중요해진 탓으로 풀이된다. 

      현지 사정에 밝은 인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삼성이나 현대차, LG그룹 모두 수십년간 제조업 수출을 주력으로 삼아왔으나 통상에서 회유와 압박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비자나 관세 우회, 중국으로의 장비 반입까지 원래 허용되던 것들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하나 둘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미 작년 연말부터 트럼프 2기 대응에 맞춰서 국제통을 배치해놨는데, 관행대로 해온 방식이 안 통하고 있다"라며 "비자는 기업이 로비를 해도 쉽지 않고, 정부가 나서도 일자리가 걸려 있어서 어찌 될지 모른다. 인력 확보도 걱정인데 여러모로 비용 문제가 커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마스가(MASGA)를 기치로 한미 조선업 협력 선봉에 선 한화그룹은 지난달 말 일찌감치 4개 계열사 대표이사 5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류두형 한화글로벌 신임 대표와 김종서 한화엔진 신임 대표 등 2명이 한화오션 출신으로 글로벌 통으로 분류된다. 라피 발타 한화파워시스템 신임 대표는 GE 출신으로 외국인이다. 지난 6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룹 컨트롤타워를 부활시키고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이 경영지원실장으로 내정된 데 이어 세 달여 만이다. 

      지난해 필리조선소 투자를 발표한 뒤 새 정부와 마스가 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인사에서도 속도를 끌어올린 것으로 풀이된다. 올 들어 통상과 국제관계 전문가를 이사회에 합류시킨 HD현대그룹 역시 비슷한 시기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병하는 등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투자업계에선 양사가 미국 현지 조선소 확보부터 현지 정부의 선박법 개정을 끌어내야 하는 만큼 계속해서 적기 인사 조치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단순히 연말연초 정기 인사로 전략가나 재무 전문가를 번갈아 등판하는 식으로는 대응이 힘들어질 거란 분석이 많다. 그간 재계에선 승계와 사업 확장을 병행하며 인수합병(M&A)이나 지배구조 개편, 구조조정 등 현안마다 필요한 인사를 배치해왔다. 그러나 그룹 내부적으로 안팎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관리하기 힘들어진다. 바뀐 환경에 맞춰 인사 시점이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진단이 늘어난다. 

      당장 주목을 받는 건 SK그룹이다. SK그룹은 작년부터 리밸런싱(사업 조정) 성과에 초점을 맞춰 인사를 전개해왔다.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중심으로 SK㈜를 비롯 계열마다 재무 전문가들이 포진해 사업 축소와 재무적 투자자(FI) 협상을 이끌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장용호 SK㈜ 사장이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을 겸하게 됐는데, 10월 CEO 전략회의 전후로 SK㈜를 포함한 몇몇 계열사에 조기 사장단 인사가 날 것이란 관측이 오르내린다.  

      SK그룹도 반도체, 2차전지, 에너지 등 통상에 민감한 사업장부터 구조조정 막이 오른 석유화학 산업까지 마주한 현안이 적지 않다. 핵심 축으로 내세운 인공지능(AI) 성과도 내놔야 한다. 승승장구하는 SK하이닉스도 최근 성과급 문제로 노동조합과 파격적 임금교섭을 치르며 달라진 노사 관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해결사 한둘을 내세운다고 치를 수 있는 난도가 아니라는 평이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지금 노란봉투법 때문에 구조조정 계산도 틀어지는데, 개정상법 이후로 내년 주총에서 주주서한 받거나 소수주주한테 공격받을까 지배구조 자문을 받고 적자인데 특별배당을 준비하는 곳도 있다"라며 "잘 사고, 잘 팔고, 실적 만들어서 상장 밀어올리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정부는 물론 미국 행정부, 국내 노조, 투자자 달래고 하는 것까지 다 현안이다"라고 설명했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들어 2인 체제로 자리 잡은 부회장직을 올해는 늘릴지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연말 권봉석 ㈜LG 부회장과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에 이어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계열사 대부분 경영진이 유임됐다. 자산 재배치 성과가 중요한 때이지만 긴축·효율화에 머무를 때가 아니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롯데나 CJ, 신세계 등 승계와 계열 분리 작업이 한창인 그룹사들의 인사 전략도 중요 대목으로 꼽힌다. 내수 기반 사업장이 줄줄이 부진을 겪는 가운데 일가 3·4세가 승진하면서 해외 진출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아직 성과를 논하기 힘든 시점이란 평가가 많다. 올해 연말 인사까진 겸직을 해소하고 성과에 다른 신상필벌이 이어질 거란 전망이 오르내린다. 다른 그룹사와 마찬가지로 인사 전략을 제고해야 할 거란 지적이 나온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한미 협상이랑 별개로 해외에서 성과를 내는 곳은 중견이나 인디 소비재 업체들이다.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을 필두로 시중 자금도 전부 그쪽을 향하고 있다"라며 "내수도 관광객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고 물이 들어오는데 대기업들이 한발 늦는다는 목소리가 많다. 재계가 기존 인사 시스템이나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하다간 밀려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