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기간 범용제품 구조조정 필요성 언급
단기적 해결 어려운만큼 그때부터 칼 댔어야
연이은 好실적에 기업들은 또 구조조정 외면
무지하고 관심없는 정치권은 표 떨어질까 걱정
한화·롯데에 매각한 삼성, 사실상 엑시트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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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 산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이 석유화학 업계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선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당사자인 기업도, 산업정책을 관장하는 정부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석유화학 구조조정 필요성은 과거부터 업계와 시장에서 꾸준하게 거론해왔다. 인베스트조선도 10년전 석유화학 구조조정 시리즈를 게재하기도 했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산업공학에 정치공학까지 더해지면서 풀어야 할 매듭은 더 많아지고 더 복잡해졌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균형보다는 단기 수익에 중점을 두고 중복투자를 해왔다. 범용 중심의 사업포트폴리오에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구조적 문제에서 지금의 위기가 나왔다. 향후 3~5년 내 산업 구조조정을 통한 포트폴리오 다각화, 원가구조 개선, 유망 신사업 발굴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현재 석유화학 업계를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10년전 기업활력제고법, 이른바 원샷법과 관련된 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그동안 업계가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글로벌 화학업체들은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끝냈거나 지속 중인 시점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선 화학전문기업들이 일찍이 전문성(specialty)을 강화한 '탈(脫)범용' 전략을 자발적으로 추진했다. 유럽에선 토탈, 베르살리스, 이네오스 등이 노후화된 설비들을 폐쇄하고 원료 다양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국에선 다우케미칼과 듀폰이 합병하며 세계 2위의 '화학공룡'이 탄생했지만 몸집 불리기보다는 전문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농업화학, 기능소재, 뉴트리션·전자화학을 중심으로 한 사업포트폴리오 재편이 핵심이었다.
일본은 40년 가까이 정부 주도 하에 과잉설비를 정리하고 인수합병(M&A) 등을 유도하는 등 꾸준히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탈범용제품 전략을 추진하며 전자나 헬스케어 등으로 사업영역을 전환한 미쓰비시와 스미토모가 대표적이다.
애초에 석유화학은 산업 특성상 정부가 구조조정을 이끌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더라고 글로벌 경기, 유가, 해외기업들의 설비투자, 경쟁국 수급상황 등 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외변수는 통제가 어렵다. 대규모 장치산업이라 M&A나 자산 인수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제품군은 다양하고 제품마다 업황은 제각각이라 몇몇 제품의 공급과잉 및 스프레드 악화 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거론하긴 쉽지 않다.
특정 생산설비만 따로 떼어 매각하는 것도 쉽지 않아 같은 산업단지 내 통폐합이 필수불가결이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도 다양하다. 국내 기업들은 정책금융과 시중은행들 외에도 주식시장과 회사채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에 다양한 기관 및 개인투자자들이 엮여 있다. 정부가 혼자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다.
타이밍도 놓쳤다. 2015년 하반기를 앞두고 대외 환경이 조금 개선되면서 석유화학 기업들의 실적이 연달아 개선되자 구조조정 얘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업계에선 "시장 자율에 맡기라"고 외쳤고 정부도 나설 명분이 사라졌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기업은 스스로 외면했고 정부는 의지가 없었다.
코로나 기간이 더해진 지난 10년은 '대(大)레버리지의 시대'였다. 정유, 석유화학 대기업들은 구조조정보다는 확장에 꽂혔다. 범용성 제품이 만들어주는 현금, 금융기관과 투자자로부터 빌린 투자금을 기반으로 '이차전지'라는 새로운 테마에 대대적인 중복투자가 이뤄졌다. 이 순간이 계속될 거라는 믿음에 리스크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대통령 탄핵만 두 번이 있었던 정치권은 리스크를 감지할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당장 우리 편의 표가 소중한데 구조조정을 언급하는건 여(與)나 야(野)나 언감생심이다. 거기에 노란봉투법이 더해졌다.
이렇다보니 삼성과 한화·롯데의 빅딜이 지난 10년간 삼성그룹 최고의 딜(deal), 더 나아가 한국 최고의 구조조정 딜이었다는 평가가 재조명받고 있다. 삼성은 2014년에 삼성토탈과 삼성종합화학을 한화그룹에 매각했고 이듬해인 2015년엔 삼성SDI 케미칼부문,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지분을 롯데케미칼에 매각했다.
표면적으로 삼성은 한화와의 빅딜에선 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 등 방산업체까지 포함해 2조원, 롯데와의 빅딜에선 3조원 등 5조원을 받아냈다. 이후 있었을, 그리고 앞으로 있을 구조조정 관련 물질적·정신적 수고로움을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그 이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반도체 하나도 집중하기 어려운 삼성그룹의 경영 난도는 더 높아졌을 가능성이 크다. 노란봉투법까지 통과된 상황에서 삼성이 구조조정을 단행하긴 쉽지 않고 이는 한국 석유화학 업계 전체로 전이 될 수 있다.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저마다 구조조정 중이긴 하다. 회사의 재무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자산 매각을 하고 있는데 일단 팔 수 있는 것부터 팔고 있다. 그러니 정작 건드려야 할 핵심 범용제품은 건들지 못하고 추후 신성장동력이 될법한 것들만 떼내고 있는 실정이다. 악순환이 염려된다.
정부가 대규모 설비 감축을 요구했지만 세심함은 크게 부족하다. 업계 자율적으로 생산을 줄이라는 건데 정부와 여당은 직접 손에 칼을 쥘 생각은 없어 보인다. 자칫 향후 10년을 또 허송세월하며 미래가 짊어져야 할 부담만 커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