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같은 지수 만들어줘'...운용사 ETF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지수 사업자'
입력 2025.09.16 07:00
    '300조' 앞둔 ETF 시장…카피캣 확산에 지수 사업자 이해 충돌
    미래에셋 K-배당 ETF 흥행 뒤 유사 지수 요청 쇄도…사업자 난색
    폭발적 성장 이면엔 모방 관행…"업계 차원의 자성과 절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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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을 두고 자산운용사 사이의 경쟁이 과열되며, '지수 사업자'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코스피200처럼 지표가 되는 지수(인덱스;Index)가 아닌, 자율적으로 설정한 특정 지수를 기반으로 ETF를 출시하는 게 유행이 되며, 지수 사업자들은 동일·유사 지수 제공 여부와 고객 관리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특정 ETF가 흥행하면 테마·지수를 즉각 복제하는 '카피캣' 관행이 핵심 배경이다. 지수 사업자들은 한쪽의 요구를 수용하면 다른 쪽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토로한다.

      지난 5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S&P다우존스 인덱스와 협업해 출시한 '코리아배당다우존스'는 출시 4개월 만에 순자산 5000억원을 돌파했다. 이 상품은 국내 맞춤형 K-SCHD 성격의 신규 지수를 추종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 상품이 흥행하자, 국내 몇몇 운용사들이 해당 신규 지수 사업자에게 '유사 지수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해당 지수 사업자는 차별성 부족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사 지수 복수 제공이 기존 고객들 사이의 정면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사 지수 복수 제공이 어려워지자, ETF의 이름이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삼성자산운용은 지난달 말 'KODEX 배당성장'과 'KODEX 배당성장채권혼합' 명칭에서 '배당' 단어를 '코리아배당'으로 변경했고, 신한자산운용도 신규 배당 ETF에 '코리아고배당'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표면적으로는 상품 특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정이지만, 일반적으로 동일 지수를 확보하기 어려울 때 택하는 차선 전략에 가깝다"며 "히트 상품의 네이밍을 모방해 주목도를 높일 수 있지만, 투자자 혼동을 초래한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 ETF 시장은 지난 8일 기준 순자산총액(AUM) 233조739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기준 약 170조원이었던 시장이 불과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30% 이상 증가한 것이다. 보수 인하 경쟁이 심화된 가운데 특정 콘셉트가 성공하면 유사 상품이 잇따라 등장하는 구조가 고착됐다는 평가다. 주요 운용사들은 점유율 방어·확대를 위해 경쟁사의 검증된 테마를 신속히 차용하는 방식을 일반화했다.

      이 과정에서 지수 사업자의 부담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S&P500 등 대표지수는 비교적 개방적이지만, 운용사와 협업해 새로 설계한 지수는 기획 공로와 독자성을 존중해 동일·유사 지수 제공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지수 사업자 입장에서는 국내 주요 운용사가 모두 고객인 만큼, 조정 부담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한 지수 사업자 고위 관계자는 "모든 운용사가 고객이기 때문에 지수 제공이라는 본연의 역할과 상도덕 사이에서 운영이 갈수록 골치아프다"고 말했다.

      물론 치열한 카피캣 경쟁이 신상품 개발을 자극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커버드콜 ETF가 강세를 보이자 동일 포맷만으로는 차별화에 한계가 생겼고, 대안 콘셉트로 삼성자산운용과 지수 사업자가 협력해 버퍼형 ETF를 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수의 문턱을 우회해 '비슷하되 다르게' 접근한 결과로, 과열 경쟁이 변형된 혁신으로 이어진 셈이다.

      다만 베끼기 관행의 지속성은 여전히 업계의 고민이다. 특정 운용사와 공동 설계한 지수는 해당 지수 사업자가 타사에 동일하게 제공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업자를 통해 유사 지수를 만드는 데 현실적인 제약이 크지 않다. 

      한 자산운용사 실무자는 "완전히 동일한 방법론이 아닌 이상 다른 지수사를 통해 유사 지수를 만드는 데 제한이 거의 없다"며 "거래소가 실질적으로 배타적 사용권을 인정한 사례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지수 사업자의 역할 충돌은 상수로 자리 잡았다는게 업계 지적이다. 한쪽에서는 "왜 경쟁사에 같은 지수를 주느냐", 다른 쪽에서는 "왜 우리에게는 안 주느냐"는 요구가 동시에 나오는만큼, 사업자는 양측 이해를 조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카피캣 관행이 길어질수록 업계 이해관계자 간 갈등이 커질 수 있고 나아가 ETF 시장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며 "과열된 경쟁 속에서 업계 차원의 자성과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