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 부실 장기화가 만든 '유치권 마켓'…전문 브로커들도 활개
입력 2025.09.22 07:00
    취재노트
    채권자 외 제 3자까지 개입해 권리 악용
    S~B급까지 분류…컨설팅 업체도 등장
    "제도 취지 벗어나 시장 교란 도구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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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전국적으로 ‘유치권 전문 브로커’가 활개를 치고 있다. 분양 부진과 자금 경색으로 공사가 중단되거나 유동성 위기에 몰린 사업장이 늘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유치권을 내세운 권리 주장과 분쟁이 급증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이미 ‘유치권 마켓’이 형성됐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유치권(留置權)은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시공사나 하도급업체가 해당 건물을 점유하면서 채권을 확보하는 권리다. 원래 영세 건설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실제 채권자 외 제 3자까지 개입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본래 제도의 취지를 벗어난 악용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유치권 전문 브로커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금을 대는 전주(錢主)가 따로 있고, 브로커들이 용역업체 인력을 동원해 권리 주장을 실행하는 구조다. 통상 하나의 브로커가 전국에서 4~5곳 정도의 사업장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악성 채권을 처리하거나 법적 다툼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아예 유치권 행사만을 전문적으로 연결해 주는 컨설팅 업체도 등장했다. 브로커들은 통상 S급에서 B급까지 분류된다. 예컨대 B급 브로커가 관리하는 사업장에 S급 브로커가 해당 사업장 채권자에게 접근해 "한 번에 정리해주겠다"며 일정 금액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은 미리 제작한 플랜카드를 사업장에 걸어두고, 펜스를 보강하거나 철조망을 설치해 현장 접근을 막는다. 일부는 용역업체 인력을 투입해 출입을 봉쇄하거나 현수막에 법률 문구를 기재해 법적 정당성을 가장하기도 한다. 이후 단전·단수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공과금만 납부하면서 건물을 점유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에게 압박을 가하고, 사실상 합의금이나 대가를 챙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공사대금, 자재비 등 각종 미지급 채권이 늘어나자 이 틈새를 노리고 권리 행사를 대행, 중개하는 사업 모델이 자리잡은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실제 채권자가 정당하게 유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 3자가 끼어들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이해당사자 간 분쟁이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장기간 소송으로 가기보다는 브로커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사태를 정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금융권 변호사는 “유치권은 부동산 경기 사이클에 따라 주기적으로 논란이 반복된다”며 “심지어 유치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부동산 경기 불황이 장기화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부동산 PF 구조조정과 미분양 해소가 지연되면 유치권 행사 건수가 늘어나고, 이를 둘러싼 브로커 시장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법무부는 2013년 7월 등기를 마친 부동산에 대해서는 유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민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유치권 제도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고, 채권자 보호 장치를 마련해 제도 운영상 미비점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등기부에 공시되지 않음에도 우선변제를 받아 제 3자에게 손해를 끼치고, 유치권자의 점유로 인해 부동산 사용·수익이 제한돼 사회경제적 효용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제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해당 개정안은 폐기됐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정상적인 유치권 행사라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면 되지만, 최근에는 브로커 개입으로 인해 협박성, 기획성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채권자 보호 취지의 제도가 오히려 시장 교란 도구로 변질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