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兆 중 얼마나 넣어야 하나…시중은행들 국민성장펀드 두고 골머리
입력 2025.09.23 07:00
    150조 중 절반 민간에서 조달
    은행에 연간 조단위 부담 발생
    많이 내자니 건전성 관리 압박
    적게 냈다간 정부 눈밖 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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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가 추진하는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보는 시중은행들의 속내가 복잡하다. 자금 절반을 민간에서 조달하기로 했는데 시중은행에 상당한 부담이 지워질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자금 지원을 공언하자니 여력이 많지 않고, 현실적인 선을 제시하자니 정부의 눈밖에 날까 걱정된다. 주판알을 튀기며 눈치를 보는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10일 정부는 부처합동으로 국민성장펀드 운용 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5년간 150조원의 자금을 첨단전략산업과 밸류체인에 투입해 산업경쟁력강화, 벤처기술기업 성장, 일자리창출 효과를 꾀하기로 했다. 인공지능(AI, 30조원), 반도체(20조9000억원), 모빌리티(15조4000억원) 등이 주요 지원 대상이다.

      펀드 재원 중 75조원을 국민, 연기금·금융사, 기업들로부터 조달한다. 기업들도 일정 부분 참여하겠지만 여력이 많은 곳은 드물다. 지원의 주체보다는 객체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 시절 뉴딜펀드 사례를 감안하면 개인들이 얼마나 호응할지도 의문이다. 결국 연기금과 금융사, 그 중에서도 시중은행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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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는 금융지주 전략책임자들을 불러 면담하고 국민성장펀드 지원 방안을 도출해달라 독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시중은행 투자 관련 부서들이 주제에 맞춰 펀드 참여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다만 아직 펀드의 얼개만 나왔을 뿐 구체적인 실행방법론은 나와 있지 않다. 각 은행 투자부서들이 서로 의견을 공유하며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A은행 관계자는 "지주 차원에서 국민성장펀드 참여 방안을 가능한 빨리 검토하라고 해서 각 부서에서 움직이고 있다"며 "펀드의 취지는 좋지만 아직 구체적인 운용 계획이 나와 있지 않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의 핵심 고민은 결국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해야 하느냐다.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100조원 규모가 거론됐는데 갑자기 50조원이나 늘어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엿보인다.

      150조원을 5년간 지원한다는 계획이니 1년에 30조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권 말미로 갈수록 정책의 힘이 약화하기 때문에 정부는 초기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효과를 내려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첫 해에 50조원을 집행한다면 그 중 절반인 25조원을 민간에서 지원해야 하고, 또 그 중 절반 이상이 금융권 부담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연기금, 국책은행을 포함해도 그 수가 많지 않다. 시중은행들은 첫해부터 1조~2조원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점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은행들이 선뜻 먼저 금액을 제안하긴 조심스럽다. 은행들은 이자놀음으로 비판받고 있지만 지난 수년간 쌓인 잠재적 충당금도 적지 않다. 매년 수조원의 이익을 거둔다 해도 실질 자금 집행 여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B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이 돈을 잘 번다지만 매년 조단위 자금을 다른 곳에 쓰는 것은 쉽지 않다"며 "재무 여력이 약한 곳은 휘청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의 제안이 정부의 '모범답안'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괜히 먼저 나섰다가 '성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기라도 하면 가만 있느니만 못하다는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실제 자금 집행 계획을 제시했다가 당국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은행 관계자는 "최근 한 금융기관은 천억원대 지원안을 냈다가 반려됐다"며 "은행들도 정부가 얼마를 바라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살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의 자금이 주로 투자 쪽에 집중된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투자는 대출과 달리 위험가중치가 높기 때문에 건전성 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당국에서 이를 완화할 방안을 제시하더라도 썩 내키지 않을 수 있다.

      D은행 관계자는 "대출을 집행하는 산업은행과 달리 시중은행은 투자만 하는 것으로 정해지면 자본비율 관리 부담에 조단위 자금을 집행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