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손배 청구 제한에 '협상력 약화' 우려
금융노조 쟁의권 확보…협상 지형 변화 불가피
법 적용 범위 해석 논란…세부 지침 마련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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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의 파장이 제조·건설업계를 넘어 금융권으로 번지고 있다. 금융권은 하청·도급 구조가 없어 직접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노조 파업이 현실화할 경우 손해배상 소송 등 법적 분쟁에서 은행들도 법 적용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정식 명칭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다.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6개월의 유예 기간 이후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핵심은 노동쟁의와 관련한 책임 범위를 조정하고 사용자 개념을 확대한 것으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로 인해 노조 활동이 위축되는 것을 막고, 원청-하청 간 책임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다.
개정안은 크게 세 가지 변화를 담았다. ▲첫째, 쟁의행위로 발생한 손해에 대해 사용자가 노조·조합원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법원이 책임을 감경할 수 있도록 한 것(노조법 제3조 관련) ▲둘째, 사용자 개념을 근로계약상 당사자뿐 아니라 근로조건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청까지 확대한 것(제2조 제2호 개정) ▲셋째, 쟁의 대상에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의 결정'까지 포함시켜 합법적 쟁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이 가운데 은행권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손해배상 청구 제한 조항이다. 과거에는 은행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해 전산장애, 영업 차질, 수수료 수입 감소 등이 발생하면 은행이 노조와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정법은 손해배상 청구 범위를 좁히고, 법원의 책임 감경·면책 판단을 명시하면서 기존보다 기업 측 대응이 제한된다.
즉, 은행 입장에서는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는 셈이다. 다만 폭력이나 설비 파괴 등 명백한 불법행위가 수반된 경우에는 여전히 손배 청구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 은행권에서는 "파업 리스크가 낮아지면 노조 쟁의는 더 빈번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제조·건설업 뿐만 아니라 은행도 노란봉투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며 "노조가 주 4.5일제 도입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거론하는 상황에서, 법 시행으로 은행의 법적 대응 수단이 줄어들면 협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국금융산업노조는 노란봉투법이 국회 문턱을 통과하자 주 4.5일제 도입, 성과급 체계 개선 등을 요구하며 쟁의권 확보 절차에 돌입했다. 과거에는 은행이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손배 청구 가능성을 협상 카드로 활용했지만, 앞으로는 협상 지형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소비자 피해 가능성도 경계하고 있다. 은행 파업이 장기화돼 창구 업무 지연이나 전산 장애가 발생해도, 경영진이 손배소로 대응하기 어려워 피해가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정치권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와 금융권에서 법안 보완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국회 후속 논의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법 적용 범위와 불법 행위의 판단 기준을 둘러싸고 추가적인 해석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7일 진행된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노란봉투법과 관련해 "법 시행 전 6개월의 유예 기간 동안 최대한 빨리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구체적 세부 지침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는 법 취지를 '노동권 보장'이라고 설명하지만, 금융권 입장에서는 노조 쟁의가 잦아지고 소비자 피해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불안이 더 크다"며 "가이드라인이 나오더라도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세부 기준이 마련되지 않으면 혼란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