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충실의무 단정 어렵지만 불필요한 분쟁 가능" 경고
"정부 '밸류업' 기조 속 KCC 결정, 다른 기업 EB 전략에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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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가 자사주를 기초로 교환사채(EB) 발행을 예고하자 시장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공시 직후 주가가 10% 넘게 급락했고, 기관이 공개서한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취지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법조계에 관련 자문을 구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24일 KCC는 전체 자사주(지분율 17.24%) 중 3.9%(약 35만주)만 소각하고, 9.9%(88만여주)는 EB 발행에 활용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3.4%는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출연한다는 계획이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23일 종가 41만7000원이던 주가는 공시 하루 만에 36만8000원으로 11.7% 하락했고, 25일에는 36만3000원으로 추가 하락했다. 26일 오전 기준으로는 36만원 선이 무너졌다(35만8000원). 불과 이틀 새 시가총액 4000억원 이상이 증발했다.
법조계에서도 이번 사안이 단순히 주가 급락 차원의 논란을 넘어 법적 쟁점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실제로 법조계에는 이번 KCC의 자사주 EB 발행과 관련한 법률자문 요청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상법 개정안이 시행 초기 단계인 만큼 '주주충실의무' 위반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신중론이 많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개정안 시행 전에 EB 발행을 서두르면서 선례적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는 존재한다.
실제로 태광산업의 EB 발행 건에서는 2대 주주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전례가 있다. 법원은 이를 기각했지만, 주가는 반등하지 못한 채 장기간 하락세를 이어갔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아직 명확한 판례가 없고 해석도 정립되지 않았지만,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시각이 공유된다.
투자자들이 기대한 것은 자사주 소각이었다. 소각이 이뤄지면 유통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상승하고 기존 주주 지분가치가 높아진다. 그러나 자사주를 EB 발행에 활용하면 교환청구 시 신주 발행과 유사한 희석효과가 불가피하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 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증권사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LS증권은 KCC의 목표주가를 52만4000원에서 46만원으로 하향 조정하며 "삼성물산 지분 10%를 보유하고도 자사주를 먼저 활용한 것은 투자자 입장에서 이례적"이라고 지적했다.
기관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라이프자산운용은 이사회와 경영진에 보낸 서한에서 "EB 발행 자체는 재무개선 목적상 타당할 수 있으나, 시총을 웃도는 삼성물산 지분을 먼저 활용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자본배분 효율성 측면에서도 자사주보다 타사주를 유동화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지난 7월 KCC가 HD한국조선해양 지분을 기초로 8800억원 규모의 EB 발행을 공시했을 때, 주가는 10영업일간 23% 이상 상승했다. 이번과는 정반대의 양상이다.
이번 KCC EB 발행은 기관 수요조사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원금보장형 채권 구조에 주가 상승 시 차익까지 노릴 수 있다는 점이 기관에겐 매력적이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같은 구조는 기존 주주에겐 정반대다. 회사와 기관은 손해를 보지 않는 반면, 주주만 불이익을 떠안는 구조라는 점에서 반발이 더욱 커졌다. 주주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공개서한까지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여론 악화는 KCC가 타 기업보다 비판 강도를 더 크게 맞는 배경이 됐다. 최근 DB하이텍 등도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을 공시하면서 비판에 직면했지만 대부분 일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강행했다.
DB하이텍은 보유 자사주 416만주를 소각, EB 발행, 임직원 보상 및 복지기금 출연이라는 세 갈래 방안을 동시에 공개하며 논란을 완화했다. 실질적인 주주환원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KCC는 최종 발행 여부를 이사회 결의를 통해 올해 4분기 중 확정할 계획이다. 회사 측은 "발행 결과가 부족하면 보유 예금을 활용해 재원을 보완하고, 조달 자금은 차입금 상환 등 재무구조 개선에 사용할 것"이라며 "시장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기관과 주주가 동시에 반발하는 상황에서 EB 발행을 강행할 경우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분위기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번 KCC 사례는 자사주 EB가 단순한 자금조달 수단을 넘어 주주 신뢰를 흔드는 문제로 번지고 있다"며 "정부가 밸류업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아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이런 행위가 이어지면 좌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KCC의 결과에 따라 향후 다른 기업들이 EB 발행을 추진할 때 전략을 세우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