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산은이 먼저 뛰어들 명분 없어
"기업들 진정성 있는 자구안 내놔야 할 것"
움직임은 있지만 아직은 계산기만 쳐다봐
'먼저 내려놓겠다' 생각 없으면 고통만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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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 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한 지금, 특히나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는 석유화학 업계에 대해 산업은행(이하 산은)의 역할론이 재조명 받고 있다. 몇 번의 비정상적인 정권 교체 과정에서 정부도, 기업도 사실상 구조조정에 손을 놓고 있었다. 다시 위기가 닥쳐오니 기업들은 산은을 쳐다보고 있는데 산은은 이미 명확히 입장을 밝혔다. 자율적인 구조조정 없이 정부나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으려는 과거의 태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정부는 나프타분해시설(NCC) 등 과잉 설비를 중심으로 감산 및 설비 통합을 추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석유화학업계는 연간 생산량을 최대 370만톤을 줄여야 하고 이를 연말까지 정부에 계획으로 제출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동참하는 기업에만 금융·세제 등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미이행 시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등 불이익을 예고 했다.
구체적인 로드맵 없이, 두루뭉술하게 알아서 생산량을 줄이라고 하면 어떡하냐는 업계의 볼멘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기업들끼리 자산 매각이나 구조조정을 위한 내부 논의를 지속하고는 있지만 정작 어느 기업이 언제 어떤 설비를 줄일지 실행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LG화학은 여수 NCC를 쿠웨이트 PIC로 매각하는 작업이 최종 무산된 뒤 GS칼텍스와 접촉하고 있다. 정부당국에서 힘을 싣는 합작사 설립 방향으로 논의가 오가고 있지만 GS칼텍스 측도 부담이 적지 않을 거란 관측이 많다. 롯데케미칼은 대산·여수 단지에서 일부 라인의 가동을 중단하며 고정비 절감에 나섰지만 단순한 가동률 조정 이상의 구조적 개편에는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와 HD현대케미칼도 롯데케미칼과 NCC 통합 논의에 참여했으나 지분 구조와 배임 우려, 법률 리스크 등으로 확정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한화와 DL의 합작사인 여천NCC는 적자 누적에 유상증자를 단행해 급한 불은 껐지만, 본질적인 체질 개선은 요원하다.
울산의 경우 정유사인 SK에너지에서 나프타를 공급받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NCC를 통합해 수직 계열화 방안이 논의 중이지만 쉽게 협의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태도는 사이클 산업이라는 특성상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석화를 포함한 다양한 산업들의 사이클이 더 이상 교과서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례들은 이미 넘치고 넘친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석화기업 13곳의 단기성차입금 규모는 28조원 규모로 집계됐다. 2022년 말보다 10조원가량 늘었다. 이미 악화된 업황과 시장 파괴자 중국의 변수를 고려하면 시간이 갈수록 그 손실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새로운 구조로 자리잡고 있다.
투자금융업계 관계자는 "거대한 장치산업 특성상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과감하게 정리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수 있다"면서도 "그래도 그 장치들을 통해 호황기에 벌어들일만큼 벌어들였고 지금부터 제때 정리하지 못한다면 그간의 돈과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가 중심인 대기업들은 정부의 늘어나는 간섭에 대해 불만은 많으면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면 또 정부에 의지하려고 한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정부 주도로 단행된 구조조정들은 일부의 불만은 있을 수 있지만 재계와 산업 전반에 퍼진 비효율성을 줄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절대적 영향력만큼이나 그림자도 짙다. 자금줄이 메마른 대기업들의 재정적 허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메우는 방어막 역할을 하다보니 '부실기업을 살리는 대출 기관'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정답을 정해놓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구조조정을 하다보니 특혜 논란을 키웠고 사후에 두고두고 골치를 썩기도 했다. 조선, 해운, 항공 구조조정에서 불거진 공정성 문제는 지금도 산은의 '역린'이 돼버렸다.
기업들의 투자자들이 소수 은행 중심의 채권단에서 다양한 국내외 기관 및 개인투자자, 사모펀드(PEF)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로 모으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점, 그리고 그 투자자들의 권리를 더 높게 쳐줘야 하는 트렌드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산은 주도의 구조조정을 어렵게 하는 현실적 배경이다.
산은은 "먼저 기업들이 자구 노력을 해야 추가적인 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계산기만 두드릴뿐 누구도 앞장서서 자구안을 내놓지 않는 걸 보면 다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은가보다'라는 속내의 다른 표현이다.
기업들은 산은의 지원으로 한 고비만 넘기면 되겠다 생각하겠지만 정책금융의 산증인이자 첫 내부출신 회장을 맞은 산은은 과거의 산은이 아니다. 이제 기업들도 정책금융과 지원을 받으려면 그만큼의 명분을 쌓는 노력을 하고 정부를 설득하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해졌다.
9월30일엔 금융위원회 주도로 17개 은행과 4개 정책금융기관이 참여하는 '산업 구조혁신 지원 금융권 협약식'이 있었다. 금융권은 도울 준비를 마쳤으니 석화업계가 구체적인 그림을 직접 그려오라고 촉구하는 게 핵심이었다. 이제 석화 구조조정의 성과 여부는 대기업과 대주주들의 선택에 달렸다. 이번에도 금융지원을 통해 한 고비만 넘기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