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불과 2~3년 만에 매물로… 조기 철수 뚜렷
PEF도 금리 부담에 "팔 수 있을 때 팔자"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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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M&A 시장은 ‘누가 더 공격적으로 확장하는가’가 아닌 ‘누가 먼저 내려놓는가’로 요약된다. 과거에는 SI(전략적 투자자)와 FI(재무적투자자)인 PEF(사모펀드)의 역할이 뚜렷했다. 대기업은 전략적 시너지를, PEF는 재무적 수익 극대화를 노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디레버리지(재무구조 개선·부채 축소)’ 기조에선 두 축의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
한때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투자했던 자산이 불과 5년 안에 매물로 나오고, PEF들은 밸류업 전략 실패로 장기 보유 사례가 누적되고 있다. 엑시트가 막히자 중고거래와 같은 세컨더리 거래로 몰리는 흐름도 뚜렷하다. 전략적 인수와 재무적 투자 간 경계가 흐려진 ‘조기 철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다.
최근 DL케미칼은 이소프렌라텍스(IRL) 제조사인 해외 자회사 카리플렉스 매각을 추진 중이다. 글로벌 IB를 대상으로 주관사 선정도 막바지 단계다. 2020년 약 6200억원을 들여 글로벌 화학사 크레이튼의 IRL 사업부를 인수해 설립했고, 2022년에는 5000억원을 추가 투입해 싱가포르 설비를 증설했다.
그러나 석유화학 업황 부진 속에 재무 부담이 가중되면서 수익이 나는 해외 자회사를 불과 몇 년 만에 매물로 내놨다. 스페셜티 신사업 확대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구조조정 성격이 짙다는 평가다. DL케미칼은 2022년 그룹 역대 최대 빅딜인 크레이튼(약 1조9000억원) 인수를 단행하며 부채비율이 급등했다. 여천NCC의 대규모 손실까지 겹치자 올해 1분기 말 부채비율은 350%에 달했다.
한화는 오너 3세 김동선 부사장이 주도한 미국 수제버거 브랜드 파이브가이즈의 한국 진출을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에 사업권 매각을 추진 중이다. 오너가 직접 추진한 딜로 상징성이 컸지만, 수익성 개선은 더뎠고 모회사 자금 부담은 이어졌다. 결국 짧은 기간 만에 매물로 나왔다는 평가다.
신세계그룹의 역대 ‘빅딜’이었던 이베이도 부담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전략을 틀었다. 신세계는 2021년 이마트를 통해 약 3조4000억원에 이베이코리아를 인수했지만, 통합은 더뎠고 시너지도 미미했다. 신세계는 지마켓을 현물 출자해 알리바바와 합작법인(JV)을 세우기로 했고, 이달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회사 측은 전략적 협력을 내세우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포기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장기 시너지’를 노리는 기업들조차 더 이상 M&A에서 ‘조기 정리’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다. 급변하는 산업 구조와 대외 환경이 이런 흐름을 앞당기고 있다.
유동성이 풍부했던 호황기에는 중견·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빅딜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으로 SK그룹이 그런 흐름을 상징한다. 공격적으로 신사업과 해외 인수에 나섰지만, 작년부터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먼저 나서고 있다. 인수 후 5년 안에 재매각하거나 철회한 자회사나 사업부도 적지 않다.
세대교체 기조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몇 년간 국내 대기업에서는 ‘3세 승계’가 본격화됐다. 이렇다 보니 다수 SI들의 빅딜은 기업 내부 정치적 배경에 따른 ‘오버베팅’ 성격이 짙었다. 승계를 앞둔 그룹들은 지분 조정이나 차세대 오너의 트랙레코드를 쌓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승계 과정에서 그룹 경영진과 오너 곁에서 M&A를 담당하던 책임자들도 교체가 이어졌다.
한 M&A업계 관계자는 “당시에는 그룹 방향과 타당해 보였던 전략이 지금의 축소 기조에서는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며 “승계 국면에서는 부담되는 자산을 계속 보유하다가 상황이 악화하면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기 때문에 서둘러 털어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도 작용한다”고 말했다.
반면 PEF들은 장기 보유 중인 사례가 적지 않다. 홈플러스, 네파, SK해운, 에이블씨앤씨, 교보생명, 시몬느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M&A시장이 활성화되고 PEF들이 본격적으로 바이아웃 플레이어로 부상한 시점을 2010년대 초반으로 본다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0년 가까이 보유한 포트폴리오가 됐다.
최근 LP들은 PEF에게 사업 전환과 밸류업을 통한 성과를 기대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PEF의 핵심 ‘무기’로는 밸류업이 꼽히지만 ‘아픈 손가락’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성과를 낸 것들은 볼트온을 통한 외형 확대나 시장 성장세에 편승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평가다. 공차 같은 과거 사례가 여전히 대표 케이스로 거론되는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레버리지 거래를 기반으로 하는 PEF들 역시 금리와 인수금융 부담에 등골이 휘고 있다. 이렇다보니 기회만 보이면 빠르게 엑시트에 나서려는 기조가 뚜렷하다. LP 입장에서도 불확실성을 끌고 가기보다는 단기에 수익을 내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결국 펀드 간 자산을 주고받는 세컨더리 거래가 성행하고 있다. ‘PEF끼리 돌려막기’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살 때보다 비싸게 팔아야 하는 PEF들로서는 수천억~수조원대 규모의 대형 딜은 글로벌 PEF가 아니면 받아줄 곳이 없는 상황이다.
한 기관 출자자(LP) 관계자는 “PEF가 사업 전환 등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밸류업을 하는 것이 본래 특징인데, 최근 그렇지 못한 곳들이 많아 보인다”며 “밸류업이 되지 않은 자산은 추가 확장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다른 원매자들이 쉽게 나서지 않고, 결국 딜이 필요한 글로벌 하우스들이 매물을 받아주는 모양새”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