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보다 '경력 올인'…불황기 대비하는 회계법인ㆍ로펌들
입력 2025.10.02 07:00
    퇴사율 감소·자문수요 둔화
    AI 확산이 촉발한 구조적 변화
    정년·임기 연장 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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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신입 회계사 채용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채용 규모는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이지만, 과거 한 해 1200명을 넘겼던 시절과 비교하면 4분의 1 가까이 줄어든 수치다. 대형 로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입보다는 당장 현장 투입이 가능한 경력 인력 확보에 집중하는 기류가 뚜렷하다. 경기 둔화와 자문 수요 위축에 대비해 ‘안정’을 택한 결과다.

      빅4 회계법인들은 올해 약 800명 수준의 신입회계사를 채용했다. 삼일이 270명으로 가장 많았고, 삼정 244명, 안진 130명, 한영 150명 순이다. 당초 700명 안팎이 거론됐으나, 미지정 회계사 발생 부담과 IT 전문인력 채용 수요가 반영돼 숫자가 다소 늘었다.

      그러나 신입 채용 확대는 제한적이다. 핵심 배경은 퇴사율 감소다. 예컨대 삼일의 경우 과거 15% 수준이던 퇴사율이 최근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연봉 및 처우 개선, 회계사 수요가 높았던 스타트업의 부진 등이 맞물리면서 이탈 요인이 줄어든 영향이다. 이로 인해 빅4는 과거처럼 대규모 신입 충원 필요성이 약화됐다.

      기업 실적 둔화로 자문 수요가 줄어든 점도 채용 축소의 주요 원인이다.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은 구조조정 압력이 커지고, 중국과 경쟁하는 산업은 경고등이 켜졌다. 반면 K-뷰티·헬스케어가 성장세를 보이지만, 산업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자문 시장 전체를 떠받치기는 어렵다. 

      그렇다 보니 국내에만 치중되어 있던 비지니스를 크로스보더 업무로 까지 확장하고 나섰다. 삼일의 경우 IB·산업 전문가(스티븐정, 곽윤구, 심건, 한인섭, 조한준)를 영입하면서 글로벌 IB 대비 약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나섰다.

      빅4 관계자는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통해도 전반적인 수요가 둔화될 조짐이 보인다”며 “긍정적 전망이 많지 않아 신입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 대형 로펌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불확실성 속에서 즉시 성과를 낼 수 있는 검증된 인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 김앤장은 김강립 전 식약처장을 영입하는 등 향후 규제 관련 소송 등이 많아질 것으로 대비하고 있다. 계엄이후 규제 및 자문 업무가 모두 축소되는 국면에 있었지만,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고 장관 인선이 마무리되면서 규제 관련 사건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사정기관 수장들이 정해지면서 내년부턴 본격적으로 사건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M&A 등 자문시장에서 입지가 탄탄한 광장은 이달 특수통 출신 김후곤 전 서울고검장을 영입했다. 김후곤 변호사는 광장 형사그룹을 이끌며 기업, 금융, 중대재해, 공정거래, 관세 등 각종 기업 관련 형사 사건 및 법령 해석 등 입법 지원 업무 등을 담당할 예정이다. 

      태평양은 '전략물자 수출통제' 전문가인 황호성 전문위원을 영입했다. 황 위원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반도체를 연구하고, 전략물자관리원(현 무역안보관리원)에서 전략물자 판정 및 국제수출통제체제 대응 등의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율촌은 윤오준 전 국가정보원 차장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최근 롯데카드 등 논란이 되고 있는 사이버 보안 측 자문을 강화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아이린 변호사를 비롯해 파트너급 외국변호사를 영입하면서 크로스보더 관련 자문을 강화하고 있다. 

      화우는 자문 업무를 강화하며 M&A 경험이 풍부한 변호사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있다. 이번달에도 사모펀드(PE)와 벤처캐피탈(VC) 인수합병 전문가인 김영주·김민주 변호사를 파트너변호사로 영입했다. 인수합병 전문가인 윤희웅·이진국·윤소연 변호사, 류명현 미국변호사를 올해 잇따라 영입하면서 금융을 기반으로 자본시장으로 영역 확대에 나서고 있다. 

      반면 신입 변호사 시장은 포화 상태다. 수백 명의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가 운영하는 연수 과정에 참여 중이며, 법무법인이나 공공기관 취업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AI 확산도 구조적 변화를 촉발한다. 회계법인은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 중이고, 로펌은 판례와 내부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아직은 시스템 구축 단계지만, 2~3년 내 일정 업무를 대체할 수준으로 진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미 클라이언트들이 AI를 활용해 방대한 자료를 자체 처리하면서 전문가 의견서 의존도가 낮아졌다. 이에 따라 자문 단가가 하락했고, 정형화된 업무에서 신규 인력 수요도 감소했다. 한 로펌 소속 회계사는 “표준화된 의견서 단가는 눈에 띄게 떨어졌고, 이는 곧 신규 채용 니즈 축소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채용 축소와 AI 확산은 자연스럽게 시니어 인력 중심 구조를 강화한다. 기존 핵심 인력이 자리를 지키면서 정년 연장 논의가 활발해졌고, 성과를 낸 경영진의 임기 연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과거에는 연임 후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지만, 불황기에는 실적으로 입증된 경영진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커졌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코로나 이후 대형 로펌들도 힘든 시기를 겪었다”며 “최근 정년과 임기 연장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는 배경에는 불확실성 속 안정 추구라는 공통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