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EB 70%가 자사주 기반…소각 의무화 앞두고 '꼼수 논란'
입력 2025.10.02 07:00
    3분기까지 EB 발행 3조원 돌파…자사주 기반이 70%
    9월 한 달에만 7381억원…올해 발행액의 3분의 1
    상법 개정 전 '선제 대응'…기업들 자사주 EB 발행 러시
    '소각 기대감에 투자했는데'…태광·KCC에 시장 불신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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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상장사들의 교환사채(EB) 발행이 사상 최대 수준으로 급증했다. 발행 EB의 70% 가까이가 자사주를 기반으로 한 물량이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상법 개정 전에 자사주를 현금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책 취지에 반하는 우회 수단'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30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9월 29일까지 발행된 EB는 총 3조1129억원, 80건에 달했다. 이 중 자사주를 기반으로 한 발행은 2조1610억원(69%)·55건이다. 올해 3분기까지 발행한 EB는 지난해 연간 발행 규모(2조248억원)는 이미 넘어섰고, 2023년 연간 발행액(1조7766억원)의 두 배를 초과한 수치다. 

      특히 지난 3월 HD한국조선해양이 자회사인 HD현대중공업 주식을 담보로 600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한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발행 EB는 자사주를 기반으로 발행한 셈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올해 메자닌 시장은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보다 EB 발행이 압도적으로 많다"라며 "CB나 BW는 현재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있어, EB 발행 러시가 마무리 되면 발행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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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업들이 EB 발행에 속도를 내는 건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와 맞물려 있다. 국회에는 이미 5건의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취득 즉시 소각'(김현정 의원안), '1년 이내 소각'(김남근·민병덕 의원안), '6개월 내 소각'(차규근 의원안),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간 내 소각'(이강일 의원안) 등 다양한 방식이 제시됐다. 업계는 '1년 유예' 안을 가장 현실적인 타협으로 본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8월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을 포함한 '2차 상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직후, 곧바로 3차 상법개정의 핵심으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지목했다. 오기형 코스피5000특위 위원장은 "3차 상법의 출발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자사주 보유를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하며 원칙적 소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기류 속에 9월 EB 발행은 급증했다. 올 9월 한 달 동안만 발행한 자사주 기반 EB는 7381억원으로 올해 발행한 자사주 기반 EB의 3분의 1에 달한다. 3차 상법개정안이 통과되기 전 자사주를 활용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스트소프트와 신성토탈을 제외한 9월 발행 EB는 모두 자사주 기반으로 이뤄졌다.

      자사주를 현금화하는 방안으로는 크게 블록세일 방식과 EB 발행이 있지만, 시장 수요는 EB에 몰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블록딜은 종가 대비 ±5% 내에서만 가격을 정할 수 있어 할인 폭이 작고, 매각 발표 직후 주가 급락 리스크도 크다. 반면 EB는 채권 성격을 띠어 만기 시 원금이 보장되고, 교환권 행사로 자사주를 받을 수 있어 투자자 매력도가 높다. 특히 최근 EB 할증률은 10% 중후반~20%까지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자사주 EB 발행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투자자가 주식으로 교환 청구를 하면 기존 주주 가치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해외에서는 자사주를 소각하는 것이 상식인데, 한국은 다시 시장에 나올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있어 글로벌 스탠더드와 괴리가 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사주 기반 EB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당긴 것은 태광산업이라는 평가다. 태광산업은 자사주 전량(24.41%, 27만1769주)을 담보로 3186억원 EB 발행을 추진했다가 시장 논란의 중심에 섰다. 2대 주주 트러스톤자산운용은 개정 상법 위반과 PBR 0.22배 저가 처분을 이유로 가처분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모두 기각했다. 이에 태광산업은 10월 중 EB 발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공시한 상황이다. 

      KCC 역시 보유 자사주 EB 발행을 결의했다가 투자자 반발로 주가가 장중 주가가 전일 대비 17%까지 급락하자 30일 계획을 철회했다. 앞서 KCC는 지난 24일 공시를 통해 자기주식 활용방안을 밝혔다. KCC는 ▲3.9%(35만주) 자사주 소각▲9.9%(88만여주) EB 발행▲3.4%(30만주) 사내근로복지기금 출연 등 총 150만여주의 자사주를 처리하려 했다. 

      해당 방안에 4000억원대 EB 발행 계획이 포함되며 시장의 큰 반발을 샀다. KCC 주주사 중 한 곳인 라이프자산운용이 25일 "삼성물산 지분을 보유하고도 자사주를 활용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공개 서한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정경희 LS증권 연구원 또한 "수조원 규모 저수익 자산은 두고 굳이 자사주로 EB를 발행한 건 정책 회피 의도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업계에서는 기업들이 소각 압박을 피해 자사주 EB를 선택하는 행보는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보고 있다. 5월까지만 해도 일부 대기업들은 대선을 앞두고 자사주 매각이나 EB 발행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칫 발행사뿐 아니라 주관 증권사까지 '본보기'로 찍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각 의무화 법안이 정기국회에서 속도를 내면서,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 움직임은 더는 피하기 어려운 흐름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결국 주주들의 반발을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인데, 주주를 위한 소각과 직원을 위한 복지재단 출자를 묶은 KCC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며 EB 발행을 검토하고 있는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블록딜 사전 공시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블록딜이 활황이었던 것처럼,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기 전에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라며 "특히 대기업들까지 나서서 자사주 기반 EB를 발행하며 수요도 충분히 받쳐주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