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에 쏠리는 '생산적 금융' 부담…딜 소싱에 펀딩까지 '이중고'
입력 2025.10.06 07:00
    은행은 담보·보증 기반, 증권사는 무담보 에쿼티
    기관도 모험자본 투자는 기피…LP 모집 난항
    세제 인센티브 확대·회수시장 활성화도 동반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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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가 이어진다. 생산적 금융을 강조하는 정부 기조에 맞춰 뭘 더 할 수 있을지, 어떤 구조로 투자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딜은 있어도 자금을 모으는 게 더 힘들다. LP들이 모험자본 투자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한 대형 증권사 본부장)

      정부가 모험자본 공급을 핵심 기조로 내세우면서 금융권 전반이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업권별 체감 온도는 엇갈리는 분위기다. 은행은 담보 여신과 정책보증이라는 안전판을 활용할 수 있는 반면, 증권사들은 담보 없는 에쿼티 투자와 자금 모집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했다는 평가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단기투자·부동산 쏠림을 줄이고, 혁신기업과 벤처기업에 자금이 흘러가도록 구조를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발행어음, IMA(종합투자계좌)와 같은 핵심 사업 인가와도 연계하면서 증권사들의 대응은 사실상 의무화됐다. 발행어음·IMA로 조달한 자금의 일정 비율을 모험자본에 투입해야 하는데, 2026년에는 10%, 2027년 20%, 2028년에는 25%까지 비율이 높아진다.

      증권사들은 발 빠르게 내부 조직을 재정비하고 나섰다. 커버리지 조직이 비상장·스케일업 기업을 발굴하면, 인수금융이나 PI 조직이 LP 모집에 나서는 식으로 협업도 활발한 분위기다. 과거 부동산·메자닌 위주에서 신산업·프리IPO 딜로 무게중심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다만 실패 확률이 높은 초기기업 투자는 투자자들이 꺼리는 만큼, 기관투자자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자는 "결국 정부가 말하는 생산적 금융은 VC들이 하던 영역을 증권사도 키우라는 건데, 경험과 인프라 차이가 크다"라며 "기관 투자자 설득이 안 되니 자칫 자기자본 리스크로만 돌아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증권사들은 수년간 부동산 PF, 메자닌 등 안정적 수익모델에 익숙해져 있었던 만큼, 모험자산 중심의 포트폴리오 전환은 '체질 개선'에 맞먹는 수준의 과제라는 평가다.

      반면 은행권은 비교적 여유가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늘상 정책펀드를 조성해왔기에, 출자 자체가 생소하지도 않다. 최근 우리금융은 향후 5년간 생산적 금융 73조원, 포용금융 7조원 등 총 80조원을 공급하겠다고 선언했고, 국민성장펀드에도 민간 파트너로 참여할 계획도 밝혔다. 은행은 담보 기반 여신을 중심으로 정책보증을 얹어낼 수 있는 구조 덕분에 기존 틀 안에서 총량을 늘리며 정책 기조에 부응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은행이 정책펀드에 출자자로 들어가는 방식도 리스크를 줄여준다. 정책펀드는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일정 비율을 먼저 책임지고, 민간 은행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구조다. 투자손실이 발생해도 손실흡수 순서는 공적자금이 앞서고, 은행은 상대적으로 후순위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담보나 보증이 붙는 여신 구조와 달리 '출자'의 형태지만, 사실상 리스크는 공공이 상당 부분 떠안아 주는 셈이다.

      이에 일각에선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단순히 모험자산 의무비율을 높이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정부가 먼저 손실을 흡수하는 '퍼스트 로스(First Loss)' 구조를 넓히거나, 정책보증을 통해 증권사가 떠안을 리스크 비중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세제 인센티브를 확대해 연기금·보험사 같은 기관 LP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무엇보다 M&A나 IPO, 세컨더리펀드 등 시장 활성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자금이 들어가더라도 출구(엑시트)가 막혀 펀딩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우려가 크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 구조에선 증권사만 맨몸으로 뛰어드는 셈인데, 정부가 리스크를 일정 부분 흡수해주고 LP 참여를 유도할 장치를 마련해주는 등의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라며 "엑시트 시장까지 열어줘야 생산적 금융이 단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자금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