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오너체제 막오른 HD현대그룹…정기선 회장, 사업확장·책임경영 '시험대'
입력 2025.10.17 15:48
    40년 가까이 이어진 전문경영인 체제 막 내려
    오너가 전면에 서며 투자 속도낼지 이목 쏠려
    '보수적' HD현대그룹, 체질 바뀔지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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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HD현대그룹이 37년만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마무리하고 오너경영 시대를 열었다. 오너 3세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회장으로 선임됐다. 사업 확장 측면에선 오너가 중심의 리더십을 통해 투자 결정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기대감이 크지만, 그간 보수적 기조를 유지해 온 그룹이 새로운 성장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도 적지 않다.

      HD현대는 1988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 권오갑 회장을 중심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수십년만에 오너가가 그룹 회장직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번 인사를 계기로 HD현대는 전문경영인 권오갑 회장의 안정적 운영을 넘어, 오너의 책임 경영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권오갑 회장이 지난 수십 년간 보여준 전문경영인 체제의 안정성은 분명 큰 자산이었다. 조선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2014년에 HD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취임해 고강도 개혁으로 2년 만에 흑자전환을 이뤄냈다. 2017년에는 그룹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며 그룹의 뼈대를 다졌다. 

      자회사 상장 전략과 지배구조 개편도 권 회장의 우산 아래 진행됐다. 오너 체제라면 잡음이 날만한 사안들도 HD현대그룹에선 권 회장이 전면에 나서있었다. 2024년 HD현대마린솔루션 상장 당시에는 '중복 상장' 논란이 불거졌고, HD현대로보틱스·HD현대삼호·HD현대사이트솔루션 등 다른 계열사들의 추가 상장 가능성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회사는 올해 들어 HD현대사이트솔루션 등 주요 자회사들의 추가 상장 가능성에 대해 선을 그었고, 상장보단 합병으로 전략을 틀었다.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의 합병을 발표한 데 이어,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건설기계사업 부문에선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조선업에선 미국과의 협력을 위한 큰 틀을 마련하겠단 계획을 내놨다. 조선업이 호황기를 맞이하며 HD현대그룹의 조선 계열사들은 실적 시즌마다 '어닝서프라이즈'를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정기선 회장은 지배구조와 관련한 주요 의사결정이 안정적 궤도에 오르고, 사업도 순항하는 최적의 시점에 회장 자리에 오른 셈이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도 있었다. 해외 투자와 같은 굵직한 의사결정에선 속도가 나기 어려웠다. 김동관 부회장을 중심으로 조선업에서 사업 확장을 이어가는 한화그룹과는 온도차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정기선 회장의 취임으로 기업의 발전 로드맵이나 투자 결정에는 속도가 날 수 있단 관측이 나온다. 특히 한미 간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 같은 대규모 사업에선 실무진 협상력 보다도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오너가 직접 일선에 선만큼 향후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가능해졌다.

      정기선 회장은 1982년생으로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준 이사장의 장남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는 사촌 사이로, 범현대가 3세 경영인이다. 그는 2009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2013년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으로 재입사한 뒤 지주회사와 조선 계열사에서 영업과 기획, 신사업 발굴을 맡으며 그룹 사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쌓았다.

      2016년에는 HD현대마린솔루션 설립을 주도해 그룹 내 주력 사업으로 키웠고,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작업을 이끌었다. 입사 16년 만에 그룹 회장에 오른 이번 인사는 그간 쌓아온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 전면에 나서겠다는 책임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정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주력 사업인 조선업은 과거 고가 수주 물량이 매출로 반영되며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올해 상반기 글로벌 발주량은 전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2028년 이후에는 벌크선 등의 선박 교체 수요가 돌아올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시장에선 2~3년 뒤 실적이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성장성을 기대하고 두산그룹으로부터 인수한 건설기계 역시, 사업이 크게 확장되긴 어렵단 평가가 많다. 해당 사업을 성장시켜 나가는 건 정 회장의 과제가 됐다. 

      영위하던 사업이 안정적 궤도에 올랐지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 더 확장하고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뚜렷한 카드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한화그룹이 방산을 축으로 금융, 유통 등으로 사업을 나눈 것과 달리 HD현대는 중공업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가 구성돼 있다. 

      권오갑 회장이 전문경영인으로서 기초를 다진 안정적 운영과 달리, 정 회장은 그룹의 미래를 위한 빠른 결정과 책임경영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37년 만에 오너경영 체제로 복귀한 것은 HD현대의 새로운 전환점"이라며 "정기선 회장이 어떻게 HD현대그룹의 가치를 끌어올릴지가 재계의 관심사로 떠오르는데, '보수적'인 회사가 이번 변화를 계기로 얼마나 달라질지도 주목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