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불발 시 자사주 '의무 소각' 리스크
증권가는 '채권형 PRS' 등 대안 모색 중
당국 공시 강화·물량 급증…EB '끝물' 관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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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증권가에서는 무분별한 EB 발행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발행 시점에서는 자금조달 효과가 크더라도, 주가 부진으로 교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만기가 도래하는 2~3년 안에 상법 개정안이 통과·시행될 경우, 기업들은 자사주를 꼼짝없이 소각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반기 기업 자금조달 시장의 최대 화두는 단연 EB(교환사채)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함에 따라, 기업들이 소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EB를 활용하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자사주를 외부로 넘기면서도 회계상 자본 항목을 조정할 수 있고, 동시에 일정 수준의 현금 유입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기업들의 판단 근거다. 주로 코스닥 상장사 위주로 EB 발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일부 대기업들도 발행을 검토하면서, 증권사 IB들도 EB 딜 소싱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현재 국회에는 자사주 의무 소각을 골자로 한 복수의 상법 개정안들이 계류 중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은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한 자사주를 의무적으로 소각해야 한다. 장기 보유 자사주가 지배구조 왜곡과 저(低) PBR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여야 모두 개선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자사주를 통한 유통주식 왜곡 문제를 주요 정책 과제로 보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제도 변화가 EB 구조와 정면으로 맞물린다는 점이다. EB는 발행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담보로 사채를 발행하고, 일정 기간 후 주가가 교환가 이상으로 오르면 투자자가 이를 주식으로 교환하는 구조다. 주가가 교환가에 미치지 못하면 교환은 불발되고, 발행사는 만기 때 원금을 현금으로 상환해야 한다.
이 경우 교환 대상이었던 자사주는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현재는 이를 장부에 그대로 보유할 수 있지만,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 자사주는 '소각 의무 대상'이 된다. 기업 입장에선 현금 유출과 자본 축소라는 이중 타격을 동시에 맞게 되는 셈이다.
한 증권사 커버리지 담당 임원은 "지금 EB를 찍는 기업 상당수가 자사주 소각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상법이 통과되면 결국 자사주를 두 번 잃게 될 수도 있다"라며 "그래서 최근에 EB를 발행하려는 기업들에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고, 다른 자사주 활용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최근 증권사들은 EB를 대신할 대안으로 채권형 PRS(Price Return Swap)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일반 PRS는 기업이 보유한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삼아 이를 유동화하는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주가 변동에 따른 수익을 이전하는 구조다. 회계상으로는 자본거래에 가깝게 인식돼 자사주 처분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반면 채권형 PRS는 이 구조를 변형해, 자사주를 실제 이전하지 않고 주가 변화에 따라 이자율이나 상환금액이 조정되는 채무성 상품으로 설계된다. 기업은 자사주를 외부로 넘기지 않으면서도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고, 회계상 부채로 인식되기 때문에 자사주 소각 의무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다는 설명이다.
금융당국도 EB 발행 급증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금감원은 최근 EB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개정안을 예고하고, 오는 20일부터 즉시 시행할 예정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자사주 기반 EB 발행 시 발행 목적·주주 영향·지배구조 변화 가능성·재매각 계획 등을 의무적으로 명시하도록 했다. 기존에는 단순한 발행 공시만으로도 조달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EB 구조가 주주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는지를 사전에 검증받게 된다.
금감원은 "기업이 주주 충실 의무에 따라 주주 관점에서 더 신중하게 교환사채 발행을 검토하도록 하는 등 주주 중심 경영 활동 정립을 유도할 것"이라며 "투자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환사채 발행에 대한 시장의 냉정한 판단과 평가를 기대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에 최근 급증했던 EB 발행도 사실상 '끝물'에 다달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 3분기 중 교환사채 발행 결정 건수는 50건, 규모는 1조4455억원으로, 전년도 전체 수준(28건·9863억원)을 크게 웃돌았다. 단기간에 물량이 쏟아지면서 투자 수요가 분산되고, 기관투자자들의 신규 매입 여력도 급격히 줄어든 상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최근 EB 발행이 단기간에 쏠리면서 시장의 소화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라며 "물량이 급증한 데다 투자자들도 상법 개정과 주가 변동성을 의식해 매입을 주저하고 있어, 수급 측면에서 이미 과열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