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에서 1년으로" 짧아진 산업 사이클…신평사 등급 판단 난이도 높아졌다
입력 2025.10.22 07:00
    에쓰오일, '긍정적' 전망에도 등급 하향 트리거
    SK하이닉스, HBM 중심 AI 반도체 수요 급증
    "연례 평가보다 수시·비정기 평가 많아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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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산업의 트렌드 변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면서 신용평가사들의 기업 신용등급 판단 난이도가 높아지고 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긍정적' 등급전망을 받았던 기업이 업황 급변으로 실적이 급락하는가 하면, '부정적' 평가를 받던 산업이 단기간에 반등세로 전환되는 등 방향성 예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추세다.

      최근 신평사들은 국내 정유사인 에쓰오일(S-OIL) 신용등급을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등급 전망 '긍정적'으로 'AA+' 등급 신용도 복귀 기대감이 컸으나, 실적이 다시 하락세로 전환하면서다.

      현재 에쓰오일 신용등급에 대해 한국기업평가는 'AA+(안정적)', 한국신용평가, NICE(나이스)신용평가는 'AA(긍정적)'로 평가했다. 2년째 등급 스플릿(신용평가사간 등급 불일치) 상태다.

      에쓰오일은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수요 위축으로 실적이 크게 흔들렸지만, 당시 신평사들은 업황 반등 가능성을 반영해 '긍정적' 아웃룩을 부여했다. 하지만 국제유가 급등과 정제마진 악화라는 반전이 찾아오며 불과 2년 만에 실적이 다시 하락세로 전환됐다. 영업이익이 급감하자 주요 신평사들의 등급 하향 트리거를 건드려 조정 압박을 받고 있다. 

      실제로 에쓰오일은 올해 6월 말 기준 3655억원의 영업손실을 떠안으며 전년 동기 대비 적자 전환했다. 당기순손실은 1113억원에 달한다. 게다가 9조원 규모를 투자해 울산 샤힌 프로젝트를 구축 중이며, 이에 따른 차입금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다.

      한 신평사 연구원은 "최근 에쓰오일 등급을 두고 내부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샤힌 프로젝트도 내년 말에 이르러서야 완공이 될텐데, 적자가 나서 등급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황의 전환 속도는 더욱 빠르다. 불과 연초까지만 해도 D램 가격 하락과 재고 부담이 부각되며 전반적인 산업 전망이 '부정적'으로 평가됐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상황은 달라졌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중심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선점해 역대 최고 수준의 영업실적을 보였다. SK하이닉스의 3분기 매출액은 24조6673억원, 영업이익은 11조3434억원으로 예상된다. 이는 2분기 매출(22조2320억원)과 영업이익(9조2129억원)을 1분기 만에 갈아치우는 기록이다.

      이달 초 한기평은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을 'AA'로 유지하되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높였다. 한기평은 "HBM 시장 내 주도적 지위를 유지하며 재무구조 개선세가 유지될 전망"이라며 "고객사 조기수요 대응능력과 스펙 충족 역량 측면의 우위를 바탕으로 HBM4에서도 주도적 공급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차전지 산업도 신평사들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든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인해 주요 이차전지 기업들이 실적 부진을 겪자 신평사들은 줄줄이 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현재 에코프로비엠(A), SK아이이테크놀로지(A), 엔켐(BB+) 등은 여전히 '부정적' 꼬리표를 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이차전지 기업들의 주가가 급등세로 전환했다. 미국과 유럽 완성차 업체들의 재고조정이 예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며 수요 회복 기대감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7.7%, 배터리 사용량은 34.9% 증가했다.

      이에 대해 한 신평사 연구원은 "등급 평가는 펀더멘털을 기준으로 하는데, 시장의 체감 변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며 "투자심리나 정책 변수까지 실시간으로 반영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산업 구조의 변화 속도가 과거보다 빨라지면서 연례화된 평가체계가 비정기적으로 변할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특히 글로벌 수급에 민감한 산업일수록 실적이 분기 단위로 변화하며, 지정학적 변수나 정책 변화에 따라 하루 만에도 전망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한 신평사 임원은 "예전에는 3년에서 길면 5년 단위로 업황 변화를 보며 등급을 조정했지만, 지금은 산업 사이클이 1년 단위로 돌아간다"며 "기존의 데이터만으로는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업황 전환이 빠른 산업군은 등급 유지 기간 자체가 짧아질 수도 있다"며 "앞으로는 연례 평가보다 수시·비정기 평가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