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밸런싱에 해킹 사고까지…수조원 투자금 부담
글로벌 투자사 자금 유치 검토했지만 성과 없어
국내서도 유치 불투명…결국 자체 부담 커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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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은 세계 1위 클라우드 기업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손잡고 울산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AI DC)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조원의 사업비 중 일부를 외부에서 유치하는 안을 검토했으나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사업비 상당 부분을 직접 조달하는 경우 SK그룹의 재무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울산시에서 '울산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이 열렸다. SK그룹은 AWS와 합작해 울산 미포 산업단지 내에 대규모 AI DC를 구축하기로 했다. 약 6만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투입되는 100MW급 대형 설비다. 향후 1GW급으로 키워 동북아 최대 AI 데이터센터 허브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SK그룹은 울산 AI DC 사업에 전사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사업을 이끄는 SK텔레콤·SK브로드밴드·SK AX 외에 SK이노베이션·SK가스(에너지), SK에코플랜트(건설) 등도 힘을 보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AI DC가 에너지, 정보통신, 반도체에 이은 4번째 먹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그룹은 일찌감치 AWS와 클라우드 사업 관련 계약을 체결했고, 그룹 내부에서도 데이터센터 관련 자산과 업무를 재배치하는 작업을 마쳤다. 울산 AI DC 사업은 지난 8월 첫 삽을 떴다. 다만 이후 진척 속도는 예상보다 더디다는 평가가 나온다.
막대한 사업비를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울산 AI DC 투자 규모는 7조원 수준으로 거론되고 있다. 투자금 일부는 AWS에서 부담할 전망이다. 그간 SK그룹이 추진했던 M&A나 투자들에 비하면 과도한 수준으로 보긴 어렵지만 전사적인 사업재조정(리밸런싱)을 진행하는 상황에선 작지 않은 부담이다.
사업을 이끄는 SK텔레콤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유심해킹 사고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뺐다. 회사는 향후 5년간 정보보호 강화에 7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5000억원 규모 고객 감사 패키지 사업도 진행 중이다. 시장 점유율은 줄고 실적도 악화하고 있다. 향후 5년간 5조원을 데이터센터 등 AI 사업에 쏟기로 했지만 여력이 충분할지는 미지수다.
SK텔레콤 측은 "사업비 조달 규모나 방안에 대해 공개한 바 없고, 밝힐 수 있는 내용도 없다"고 밝혔다.
SK그룹은 울산 AI DC 사업비 중 일부를 외부에서 마련하려 했다. 재무 영향을 감안해 차입성 조달보다는 선순위 지분투자금(Equity)을 대줄 곳을 물색했다. SK그룹과 연이 있는 글로벌 투자사들을 대상으로 1조~2조원 규모 투자 의향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SK그룹 내부적으로 자산을 정리하는 작업은 마무리됐지만 사업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지는 못하는 분위기"라며 "외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려던 계획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세계적으로 데이터센터 사업이 부상하고 있지만 이런 대형 사업에 투자할 역량과 경험을 가진 투자사는 많지 않다. 애초에 SK그룹의 선택지가 좁다 보니 성사 가능성도 작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SK그룹이 제시할 수 있는 회수 대책도 제한적이다. 독특한 인프라 자산이라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 중요산업이기 때문에 통상의 소수지분 투자에서 쓰는 안전장치를 주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투자자에 SK그룹 측 지분까지 묶어서 팔 권리(Drag along) 등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SK그룹 재무 사정상 고금리를 보장해주기도 부담스럽다.
다른 M&A 업계 관계자는 "SK그룹이 소수의 글로벌 투자사로부터 조단위 지분투자금을 조달하는 안을 검토했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는 분위기"라며 "산업적 특수성이 있는 거래고 SK그룹이 제시할 수 있는 조건도 박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발을 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K그룹이 국내에서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국내 투자자도 사업성만 보고 투자를 결정하긴 부담스럽다. 대규모 자금을 대려면 여러 곳이 모여 클럽딜 형태로 진행해야 할텐데 이 경우 권리 관계도 복잡해진다. 사업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SK온처럼 껄끄러운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결국 SK그룹으로선 사업비 상당 부분을 직접 조달해야 할 가능성이 큰데 불안 요소도 적지 않다. 일반 데이터센터와 달리 GPU 기반의 AI DC는 투자 비용이 몇 배나 많이 든다. 칩 자체도 비싸거니와 전력·열관리 솔루션 등 인프라 확보 비용도 더 들어간다. 사업 진행 중 칩 가격이 변동하거나, 장비 리드타임이 늘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들도 자체 자금만으론 데이터센터 설립 비용을 대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끼고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지만 SK그룹은 재무비율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SK텔레콤이 SK스토아 매각 등을 추진하는 것도 AI 관련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란 시각이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SK텔레콤 재무 사정 상 데이터센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 빡빡하다"며 "국가 중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국가의 자금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