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사법리스크 해소후 시급한 '압도적 1위' 경험
반도체 전방위 호조에 "지금 투자해야 과실 딸 수 있다"
캐파 확대는 물론 관련 인력에 대대적으로 투자 필요
재무통 중심 비용 통제하는 사업지원TF 놓아줘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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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한창인 이때 회자되는 팀이 있다. 바로 대구 삼성 라이온즈다. 시즌 초는 불안했고 여름에는 하위권으로 추락했지만 마지막 뒷심을 보이며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쳤고 가을 야구 무대에선 선전했다. 특히나 한화이글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선 끈질긴 승부를 펼쳤다. 패자였지만 박수를 받았다.
올해 삼성전자와 닮아있다. 상반기까진 주가가 '5만전자' 늪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실적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반도체 사업 부진 때문이었다. 만년 2위라고 생각했던 SK하이닉스에 고대역폭 메모리(HBM) 1위 자리를 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업이익에서도 뒤처져버렸다. '국민주'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10만전자'는 이룰 수 없는 헛된 희망을 뜻하는 '밈'이 돼버렸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10월27일 삼성전자 주가는 사상 처음으로 10만원을 돌파했다. 반도체 업황 회복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HBM의 경쟁력이 서서히 드러나는 점들이 영향을 미쳤다. 마침 이날은 이재용 회장의 취임 3주년이었다. 말 그대로 '축포'라 할 만했다. 사람들은 다시 주식창에서 삼성전자의 그래프를 쳐다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을 보고 있다. 빅테크들의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충 전장이 HBM에서 범용 D램으로 넓어지면서다. 메모리 수요 기업들은 장기 계약과 선주문을 확대하며 대응에 나섰고 D램 가격은 반년 만에 세 배 가까이 올랐다. 내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영업이익이 올해의 세 배 수준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UBS, 씨티증권 등 깐깐한 외국계 증권사들조차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삼성전자에 대한 눈높이를 높이고 있다. 물론 SK하이닉스에 대한 전망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동안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날 것 같던 삼성전자 입장에선 오랜만에 마주하는 '단비'다.
막상 삼성전자는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올라타서 다시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리더'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아니 지금의 결정에 달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결과는 3년 전의 투자 결과다. 지금의 투자가 3년 후의 결과를 결정짓는다"
반도체업계에서 하는 말이다. 지금의 실적 개선과 앞으로 있을 몇 년 간의 실적 기대감은 이미 과거에 투자한 결과값이라는 거다. 앞으로 삼성전자가 명실상부 반도체 '1등' 자리에 다시 오르려면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완전 해소된 이후, 삼성그룹이 가장 목말라 있는 건 '일등주의', '제일주의'라는 삼성 고유의 DNA다. 긴 시간 삼성그룹은 웅크린 채 어느 계열사도 눈에 띄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한 때 지배했던 프로스포츠에서도 '삼성'은 더 이상 승리의 아이콘이 아니었다. '승자의 경험'이 남 얘기가 되면서 내부에선 패배주의에 젖었다. 과거 경쟁 수준도 아니었던 그룹들이 치고 올라갔다. 삼성을 떠나 다른 그룹으로, 다른 나라 기업으로 떠나는 인재들은 한 둘이 아니다.
어찌됐든 삼성전자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 누가 보면 AI한테 등 떠밀린듯한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삼성전자는 원체 체급이 있었고, 또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니 그 기회를 반드시 잡으려 할 테다.
결국 돈이다. 한 때 100조원의 내부 현금을 왜 쌓아두고 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삼성전자는 그만한 돈도 없고 그조차도 지금의 사이클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계열사에서 또는 산업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으려면 그보다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대출이든, 회사채든, 주식을 활용하든 앞으로 더 많은 시장성 조달이 필요할지 모른다.
여기서 걸리는 게 딱 하나 있다. 바로 삼성그룹의 경영 시스템의 중추인 사업지원TF다. 미래전략실 후신으로 1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조직이다. 삼성전자 및 주요 전자 계열사간 중장기 사업전략 조율과 인수합병(M&A), 대규모 투자 등 핵심 의사결정 지원을 담당하는 게 역할이라는데 안팎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다수다. 그럼에도 작년말 인사와 조직 개편을 통해 정현호 부회장이 유임되고 재무통 박학규 사장이 반도체 사업 지원을 맡으면서 무게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그 보수적인 사업지원TF가 회사 금고를 열려고 할까? 아니면 회사채라도 발행하게 해줄까? 반도체 수장으로 복귀한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은 사업지원TF로부터 얼마를 확답받을 수 있을까? 그 돈이 충분할까? 삼성전자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대응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경험에서 우러난 의구심이다. 아직도 불필요한(?) 서류를 만들어오라는 사업지원TF의 지시가 이어지면서 "사업지원TF가 아닌, 사업지연TF"라는 계열사들의 불만도 여전하다.
미전실이라는 그룹의 컨트롤타워가 사라지고, 이재용 회장의 재판이 이어지는 기간 동안 사업지원TF는 한계도 있지만 존재감도 분명 있었다. 이 회장 부재 기간 동안 계열사 사장들이 일신(一身)을 위해 무분별하게 회사 레버리지를 이용했더라면? 그룹에 빚거품이 가득 껴 투자는커녕 지금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걱정을 끼치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업지원TF는 제 몫을 톡톡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이제는 이재용 회장에게, 계열사 경영진들에게, 아니면 다시 거론되고 있는 제2의 미래전략실에 바통을 넘겨줄 절호의 타이밍이다. 삼성그룹의 암흑기 때 그래도 큰 돈 잃지 않고 보수적으로 잘 경영하며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 체력을 유지한 것으로도 충분히 박수 받고 떠날 자격이 있다.
삼성라이온즈는 FA 시장에서 다시 돈을 쓰기 시작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내년에 한 발 더 나가려면 더 좋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스포츠팀이든 기업이든 결국 제 때 제대로 투자하는 것이 성적과 실적을 좌우한다. 돈을 제대로 썼다는 건 모두가 안다. 삼성라이온즈가 164만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KBO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한 것처럼 말이다.
현 시대 빅테크들이 잘 나가는 데는 리더의 결단과 임직원들의 수행 능력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이 다시 인재를, 기술을 '제일(第一)'로 여기고 '삼성제일주의'라는 DNA를 다시 심으려면 결국 이재용 회장의 선택에 달려있다.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지난 2월말부터 3월까지 실시했던 임원 대상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 세미나에서 이재용 회장은 "기술 경쟁력이 전 분야에서 훼손됐다"며 기존 경영진보다 더 뛰어난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기술과 인재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 회장도 이미 알고 있고 실행할 준비는 돼있다.
이제 삼성전자가 돈을 제대로 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