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업' KT, 정권 교체 때마다 CEO 수난
AI 정통·당청 이력 인사 요구하는 정치권
해킹 사태 이후 친정부 인사론 다시 급부상
정작 중요한 건 신사업의 연속성과 실행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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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가 또다시 '낙하산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김영섭 대표가 국정감사장에서 전격 사의를 밝히면서, KT 이사회는 이달 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꾸려 차기 CEO 공모 절차에 착수했다. 이사회 결정이 발표된 직후부터 정치권과 통신업계는 '누가 차기 대표가 될 것인가'를 두고 하마평으로 들끓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에선 벌써부터 "이번엔 AI 인사"라는 말이 돈다. 정부가 'AI 대전환'을 국정 핵심 의제로 삼은 가운데 여권 일각에선 KT 수장을 AI 전문성과 당·청 경험을 겸비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해킹 사태로 인해 보안 신뢰도가 추락한 상황에서, 'AI로 혁신하는 통신사' 이미지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논리다.
문제는 KT가 민간기업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직접 개입해 적임자를 물색하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그럼에도 현실은 다르다. 정치권의 그림자는 언제나 KT 인사에 드리워져 있었다. 2002년 민영화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 교체설'의 상징으로 불렸다. 정보통신부 출신, 청와대 행정관, 장관 자녀 등 일명 '코드 인사'들이 수차례 주요 보직에 앉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엔 채용 비리와 낙하산 인사가 동시에 터졌고,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김영섭 대표가 정권 낙하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KT 노조가 과거 김건희 여사 및 대통령실의 인사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특검을 요구한 것도 이 연장선이다. 내부에서는 "민간기업이라지만 실상은 공기업보다 정치적"이라는 자조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이사회 산하 추천위가 가동되기도 전에, 정치권은 이미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하마평의 중심엔 박윤영 전 기업부문장과 박태웅 국가AI전략위 공공AX분과장 등이 있다. 이들은 정부 고위 관계자와의 인연으로 여권 내 추천설이 끊이지 않는다.
이밖에도 김태호 전 서울교통공사 사장, 구현모·윤경림 전 KT 임원 등 과거 낙마한 후보들의 이름도 다시 거론된다. 특히 윤 전 부문장은 최근 국감에서 윤석열 정부 시절 외압설을 언급하며 정치권 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구현모 전 사장의 재등판설을 두고도 여당 내에서 여러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며 "이번엔 AI, 데이터, 디지털 국정 기조에 발맞춘 인물을 찾자는 공감대가 크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개입할 명분도 이미 마련돼 있다. 지난달 KT는 특정 지역에서 불법 소형기지국을 통한 해킹이 발생해 약 2만여명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 이사회는 긴급히 전 고객 대상 유심 무료 교체를 결정했지만, 약 1000억원에 달하는 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부 입장에선 보안 리스크와 AI 역량 강화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친정부 기술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기 쉽다. 정부가 AI 산업을 출범시키며 민간 협력 파트너로 KT를 여러 차례 언급한 점도 이런 흐름을 부추긴다. 하지만 문제는 KT가 여전히 정책 실행의 도구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 구독형 콘텐츠, 핀테크 등 주요 신사업은 연이어 지체되고 있다. AI 인프라 확장을 위해 올해만 조 단위 투자를 예고했지만, GPU 확보와 데이터센터 전력 인허가 문제로 집행 목표를 채우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디어·콘텐츠 부문에서는 구독형 플랫폼 전략이 네이버·쿠팡 등에 밀리며 시장 반응이 미비하고, 핀테크 역시 금융 규제 강화로 케이뱅크 외 사업이 정체된 상태다. 해킹 사태 이후 보안 관련 비용은 급증했고, 내부적으로도 비용 효율화 기조가 강화되고 있다. 이에 투자업계에서는 AI 관련 연구소를 비롯한 신사업 부문 예산이 긴축 기조의 영향을 받으며 연구 여건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인사의 핵심은 정치적 코드가 아니라 산업적 연속성이다. AI 전략을 설계할 민간 리더십 대신 정권 코드 맞추기용 인사가 들어올 경우 또 한 번 '정치적 사이클'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사회 내부에서는 이현석 커스터머부문장, 김채희 미디어부문장, 배순민 AI2XL 연구소장 등 내부 인사도 거론된다. 다만 해킹 사태 이후 내부 승진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KT는 다시 외부자의 손을 기다리는 구도가 됐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KT의 경우 정부가 직접 지분을 보유하진 않지만, 국민연금 등 공적 자금이 주요 주주로 남아 있다. 이 구조는 언제든지 민간기업의 외피를 쓴 준공기업으로 만들 수 있는 틈을 제공한다. KT는 지금도 '국민기업'을 자처하지만, 국민의 신뢰보다 정권의 코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간기업으로 남아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제 KT CEO 자리는 경영 전문성보다 정치적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며 "AI, 해킹, 보안이란 키워드를 내세우지만 본질은 인사권을 통한 영향력 확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