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소각 피하려는 재계, 혈맹·ADR·M&A 카드 '만지작'거리지만…
입력 2025.12.09 07:00
    취재노트
    오기형案 연내 통과 전망…내년 시작될 '자사주 쇼크'
    재계, 소각 회피하려 혈맹 찾기 시도했지만 곳곳서 충돌
    법안 허점 찾아 ADR·SPC 등 우회 카드 마련에 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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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연내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규제 법안이 통과될 것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계의 기류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평소 같으면 연말 국회 일정이 기업 의사결정에 큰 변수가 되지 않지만, 이번 만큼은 예외다. '자사주는 경영권의 최후 비축물'이라는 지난 20여년의 관행이 흔들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수조원대 자사주를 쌓아놓고 '언젠가 쓸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져온 기업일수록 움직임이 빠르다.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하나다. "어떻게든 소각만은 피한다."

      與 자사주 의무화법 통과 목전…재계도 설득 포기 분위기

      여당 일각의 반대 기류나 경제단체의 막판 설득 시도도 일명 '자사주 소각 의무화법'에 큰 변수가 되기 어렵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오기형 의원이 여당 코스피5000특위의 핵심 실무 라인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당 지도부도 해당 법안을 '밸류업 패키지'의 중심축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당론으로 추진하는 분위기다. 

      실제 11월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는 자사주 회계처리 변경, 의결권 제한, 소각 의무화 등을 포함한 개정안을 연내 처리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구도 역시 법안 통과에 유리하게 짜여 있다. 민주당이 법제사법위원회 등 핵심 상임위에서 주도권을 쥔 만큼, 정기국회 내 처리 가능성이 논쟁의 영역이 아니라 일정 문제만 남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재계가 "소각 의무화는 지나치다"고 주장해도, 법안을 '주주가치 제고 vs 기업 편의'의 구도로 바라보는 여론 앞에서 힘을 얻기 어렵다. 

      조문 자체는 정교하지 않고 예외 규정도 많지만, 통과는 시간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기업 대관팀들은 올해 11월부터 "어떤 문구가 들어가든 기본 골격은 못 바꾼다"는 판단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법안상 6개월의 유예 기간이 있지만, 골자는 취득 1년 내 소각이다.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사실상 경영권 설계 전체를 다시 그려야 한다. 무엇보다 소각은 되돌릴 수 없다. 한번 소각하면, 다시 M&A나 전략적 지분 교환에 활용할 수도 없다. 

      한 대기업 지배구조 담당 임원은 "법안 내용이 일부 조정되더라도 자사주 활용 자유도는 올해 안에 확실히 좁혀진다는 게 내부 결론"이라고 말했다.

      "소각만은 안 된다"…의원실 문턱 닳도록 드나드는 대기업들

      올해 하반기부터 국회는 재계의 민원 행렬로 북적였다. 대관 임원들이 의원회관을 수시로 오가며 "M&A 목적의 자사주는 최대한 폭넓게 인정해달라", "투자 목적으로 묶어두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모습이 반복됐다. 일부 대기업들은 회장이 직접 나서 청와대 라인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SK그룹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핵심 계열사인 SK하이닉스의 자사주만 해도 1740만7808주(2.4%), 시가 약 10조원 규모다. SK그룹 전체로도 자사주 비중은 대기업 중 최상위권이다. 

      SK그룹 측은 최근까지도 여당 핵심 인사에게 "기업형 벤처캐피탈(CVC)도, 금융사 인수도 관심이 없다. 자사주만큼은 M&A 수단으로 묶어둘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도체 투자비용만 100조원 단위를 얘기하고 있는데, 자사주를 억지 소각하면 전략 구현이 꼬인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롯데그룹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배기업 롯데지주의 경우 자사주 비중이 30%에 달해 부담이 크다. ㈜한화 역시 비중이 10%대까지 올라가면서 대안을 찾고 있다. 

      "우리 주식이 아까워"시작도 전에 무너진 혈맹 찾기

      법안이 거론되기에 앞서, 자사주를 타 기업에 넘기는 '혈맹' 방식이 우회 전략으로 떠올랐다. 자문업계에 따르면 여러 대기업들이 서로 갖고 있는 자사주를 교환하는 방안를 타진해왔다. 

      현실은 달랐다. "우리회사 주가는 오를 텐데, 너희 주가는 불확실하다"는 불신이 가장 큰 장벽이 됐다. 한 대형 금융사 임원은 "혈맹 주선을 시도했지만 서로가 '나는 저평가, 너희는 리스크'라는 논리를 버리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 과정에선 미래에셋금융그룹과 네이버가 자사주 5000억원어치를 서로 맞교환했던 사례가 주로 언급됐다. 재계가 이를 '실패 사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전략적 우정이나 우호관계로 정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서로 확인한 셈이다. 

      자사주는 결국 경영권과 결부된다. 상대가 어떤 경영 리스크를 안고 있는지, 우리 주가 흐름은 어떤지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일부 기업은 사모펀드(PEF)에 자사주를 파킹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하지만 PEF 입장에서 자사주는 '알주식'이나 마찬가지다. 활용도가 떨어지고, 회수도 불확실하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배당도 충분치 않고, LP들의 요구수익률(IRR)을 맞추기 어려운 소수지분을 굳이 인수할 필요가 없다"고 자적했다. 이 때문에 '자사주 파킹'이라는 말 자체가 업계에서 사실상 퇴장한 분위기다.

      '시간 벌기' 구간 들어선 재계…美 ADR·SPC·M&A 등 검토

      포스코, KT, 금융지주들은 상황이 비교적 단순하다. 지배구조 특성상 정부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기 어렵고, 소각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흐름이다. 반면 재벌체제 기업들은 다르다. 소각은 곧 수십 년 유지해온 지배구조의 길을 스스로 하나 지워버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에 재계에서는 해외 조달,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 해외 특수목적법인(SPC) 활용 등 갖가지 조합을 더듬고 있다. 명확히 금지된 규정이 없고 공시의무도 모호하다는 점을 활용해 "미국 예탁증서로 자사주를 전환해두면 M&A 펀딩에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따져보는 식이다.

      다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론이 크다. 기술적으론 가능하다 해도, 활용 목적이 '규제 회피'라는 점이 드러날 경우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국회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법안 발의 담당자 역시 해당 질의에 대해 "절대 ADR 문을 열어주진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증권가에서는 일제히 법안이 통과되면 자사주 소각 흐름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실제 움직임은 그 반대다. 소각을 최대한 늦추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쪽이다.

      일부는 배당 확대를 카드로 제시하며 "주주환원 늘렸으니 소각 속도는 늦춰도 되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정치권에 은근히 흘리고 있다. 다른 일부는 특정 투자 프로젝트를 법안과 엮어 "우리는 곧 할 M&A가 있으니 자사주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소각이 원칙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원칙을 어떻게든 우회해 '전략적 자산'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쥐고 있으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재계가 분주한 겨울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