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생산적 금융 압박 속 금리 왜곡·부실 리스크 확산
정책 목표 앞세운 자금 집행…책임은 결국 시중은행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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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이 ‘정책기관화’하고 있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대출을 제한하고 금리까지 정부가 사실상 조정하는 국면에서 은행의 자율성은 좁아지고 정책 집행 창구로서의 성격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출은 정부가 강조하는 산업·섹터 중심으로 재배분되는 모습이 뚜렷해지며, 시장에서는 '이쯤 되면 시중은행과 산업은행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은행들은 정부의 취지에 공감하며 포용금융 등 정책적 지원에 동참하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적잖은 반발도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이재명 대통령이 “저신용자 금리가 지나치게 높다. 현 제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 비싼 이자를 강요하는 ‘금융 계급제’와 같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이후, 은행권은 중저신용자에 대한 금리 혜택과 지원 조치를 빠르게 확대해왔다.
하지만 그 결과 고신용자의 대출 금리가 중저신용자보다 높아지는 이례적 역전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하나은행의 지난 10월 신규취급액 기준 신용점수 951~1000점(최고 신용자)의 신용한도대출 금리는 연 4.58%였다. 반면 600점 이하(최저 신용자)의 금리는 3.44%로 집계돼, 위험도가 낮은 고신용자가 오히려 더 높은 금리를 부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은행권에서는 “정부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금리 산정 원칙에 역행하고 있다”며,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벗어나는 정책 개입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책적 목적 자체에 이견은 없지만, 가격 결정 기능이 왜곡되면서 금융시장의 기본 원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포용금융 확대라는 명분 아래 중저신용자 이자 감면 조치가 이어지는 점도 업계 우려를 키우는 요소다. 신한금융은 지난 7월 서민층 대상 대출상품 1조원 규모의 금리를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일괄 인하하기로 했는데, 금융취약층의 부담을 덜어주는 조치인 동시에 향후 충당금 부담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결정으로 평가된다. 금리는 낮추지만 차주의 리스크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회장 연임 등 리더십 교체 시기가 겹치며 은행들이 포용금융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비용은 결국 예금자 돈으로 충당해야 하는 은행이 떠안게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책적 목적과 리스크 부담의 주체가 분리된 구조라는 뜻이다.
금융취약층을 대상으로 한 공적 역할 요구는 은행업의 숙명에 가깝다. 공공재를 기반으로 수익을 내는 만큼 시장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에 투입되는 재원이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예금자들의 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마냥 ‘상생’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솔직한 시선이다. 정책적 지원이 오히려 부실을 키우는 경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러한 ‘정책적 목표와 리스크 부담의 분리’는 포용금융뿐 아니라, 규모가 훨씬 큰 생산적 금융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 은행권의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생산적 금융’ 기조는 이러한 논란을 더욱 키우고 있다. 지난 11월 국내 5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농협)은 잇따라 생산적 금융 대전환 청사진을 내놓으며 향후 5년간 500조원 규모의 지원 계획을 제시했다. 각 그룹이 국민성장펀드에 10조원씩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민성장펀드의 핵심 축인 산업은행 못지않게 재원 마련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생산적 금융의 취지에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다만 문제는 그 집행 주체가 정책적 목표를 수행해야 하는 시중은행인지, 수익성과 건전성을 따져야 하는 금융회사인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이라는 명분이 리스크 관리 기준을 흐려지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현장에서는 특히 “생산적 금융이 강화될수록 부실기업으로의 자금 유입 가능성도 커진다”는 점을 가장 예민하게 본다. 성장산업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투자와 대출이 실제로는 낮은 신용도와 불확실한 사업성을 가진 기업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취지는 좋지만, 회수 가능성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부당대출·투자’ 사례들은 이러한 우려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경고등처럼 작용한다. 금융권이 특정 이익을 바라고 김건희 여사가 연관된 IMS 모빌리티에 대출·투자를 제공했다는 의혹이나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의 친인척을 둘러싼 부당대출 논란 등이 그렇다. 이 사안들을 뜯어보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부실 가능성이 큰 기업·차주에 돈이 들어갔고, 제때 회수가 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자금이 투입된 대상이 적정했는지, 회수 구조가 제대로 짜여 있었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졌는지에 있다. 그런데 생산적 금융이라는 이름 아래 정책적 압박이 강해지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판단 구조가 더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게 현장의 시각이다.
이런 사례들이 반복되자, 은행들은 정책적 목표에 맞춰 대출을 확대할 경우 향후 어떤 책임이 돌아올지 더욱 민감해졌다.
최근 시중은행들은 내년도 사업계획을 확정짓는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고민이 깊었다고 털어놓는다. 정부가 생산적 금융·포용금융 확대를 지속적으로 주문하면서 정책적 목표를 반영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진 반면, 본업 중심의 성장 전략은 상대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정 산업에 대한 대출을 확대했다가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그 책임을 어느 범위까지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려도 작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는 “정책 목표를 위해 자금을 밀어 넣게 하고, 사고가 나면 은행만 내부통제로 질타받는 것 아니냐”는 냉소까지 나온다.
결국 질문은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정책기관化되는 시중은행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책임은 누가 지는가” 요즘 은행권에서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냉정하게 회자되는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