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끌어들인 고려아연, 영풍은 즉각 반발…한진칼처럼 시급성·명분 입증 과제
입력 2025.12.15 13:45
    고려아연, 美 정부 등 대상 증자 추진
    영풍은 "최윤범 백기사 구하기" 비판
    거래 구조 명분, 시급성 등 입증해야
    美로 제조 역량 이전, 국내 여론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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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미국의 참여로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 내 제련소 설립 과정에서 미국 정부 측이 고려아연의 주요 주주로 떠오르게 된다. 미국 측은 경영권 분쟁에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에 힘어줄 가능성이 크다.

      당장 분쟁 상대방인 영풍·MBK파트너스 측은 '백기사를 구하기 위한 배신 행위'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법적 대응을 이어갈 전망이다. 앞으로 회사의 판단이나 투자 구조가 합리적이고 명분이 있는지, 시급성이 있었는지 등이 중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1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이날 이사회를 열어 미국 제련소 건설을 위해 미국 정부 측과 3조원 규모 JV를 설립하는 안을 논의하고 있다. 고려아연이 이 JV를 대상으로 유상증자를 진행하는 안도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JV가 회사의 주식 10%가량을 확보할 것으로 거론된다.

      고려아연 정관에 따르면 외국 합작법인을 대상으로만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진행할 수 있다. 2023년 HMG글로벌 대상 증자 때는 '외국의 합작법인'에 고려아연이 당사자로 참여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이에 이번엔 고려아연도 JV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을 쓴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아연의 계획이 현실화하려면 이번 거래 구조의 당위성과 증자의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 측은 지난 2020년 한진칼의 산업은행 대상 신주 발행 등 유사 사안을 적극 분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법원은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 목적이 아니고, 사업상 중요한 자본제휴이며, 긴급한 자금조달 필요성이 있다 보고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영풍 측은 즉각 반발하고 있다. 중대한 사안임에도 사전 보고가 없었고, 논의 과정에서도 철저히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회사의 사업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아연 주권'을 포기하려한다고 비판했다. 회사를 저지하기 위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 구조부터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해외 사업을 할 때는 해외 법인에 지분을 투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엔 고려아연 본사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투자금을 유치한다. 통상적이지 않은 구조다 보니 일반 주주들이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사업상 중요한 제휴라기엔 얼마간의 지분 투자로 10조원짜리 사업장이 생기는 미국 측 이익이 더 많아 보인다.

      긴급성이 있느냐를 두고도 논쟁이 생길 수 있다. 제련소 가동 시점이나 고려아연의 현금창출력 등을 감안하면 긴급하게 수조원의 자금이 필요한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의 생존이 걸려 있던 한진칼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달 주주명부 폐쇄 전 투자를 확정하기 위해 서두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현재 영풍 측은 고려아연 지분 44%를 갖고 있어 최윤범 회장과 우호세력의 지분율을 크게 앞선다. 최 회장 측 11명 대 영풍 측 4명 구도인 이사회도 내년 8명 대 7명으로 거의 대등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그러나 이번 증자가 이뤄지면 영풍 측의 지분은 희석되고 영향력도 줄어든다. 우군을 얻고 시간을 번 최윤범 회장이 최대 수혜자란 평가가 나올 만하다.

      고려아연은 기존 사업 축소가 아닌 새로운 시장을 추가로 확대한다는 데 기대를 거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아주 많지는 않았고, 미국은 중남미 등 새 시장으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미국 핵심광물 시장을 선점한다는 명분도 강조하는 분위기다.

      고려아연 측의 명분이 다소 흐릿해 보이지만 영풍 측이 제동을 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고려아연의 행보는 미국의 핵심광물 안보 강화, 한-미 관세 협상 흐름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제련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고려아연에 주목했다.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 미국 순방 때 최윤범 회장도 동행해 관련 논의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조율된 중요 의사 결정 사항으로 볼 수 있다.

      작년 말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철회한 이력이 있는 고려아연은 이번에도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다만 올해 우리 정부가 미국과 관계 강화에 전력을 다한 만큼 관련 부처들이 이번 거래에서 제동을 걸려 할지는 의문이다. 최근 사모펀드(PEF) 업계에 대한 정부 여당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변수다.

      여론의 향방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안의 본질은 결국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제조 역량 일부를 미국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기존 수출 물량을 미국에서 담당하면 당장 온산제련소의 일감이 줄고, 장기적으로 일자리도 같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임직원과 울산 지역 경제가 이를 반길지 의문이다. 잡음이 생기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선 한국 제조업과는 무관하게 10조원짜리 사업장과 일자리가 생기는 셈이니 이득"이라며 "주주들 입장에선 이번 증자 거래가 신기술 도입, 재무구조 개선 등에 해당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