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떠난 상태에서 정치 쟁점화 하는 배경에 설왕설래
용인도 인재 남방한계선 턱걸이…美서도 노리는 판에
슈퍼사이클·지방선거 앞두고 정치권 청구서 본격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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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방 이전 문제가 쟁점화하고 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 이미 이전 불가능한 단계까지 사업이 진행됐음에도 선거철과 슈퍼사이클(초호황)이 겹치면서 막무가내식 청구서가 날아드는 장면이란 목소리가 적지 않다.
투자업계는 현재 반도체 클러스터의 영·호남 지역 이전 또는 투자 확대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역 이전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자 지역마다 이전 필요성이나 당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는 탓이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부 자문을 제공하는 시장 관계자들까지 제각기 주장을 펼치면서 힘겨루기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아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미 반년여 전부터 반도체 산업단지의 지방 이전을 둘러싼 정치적 주장이 들끓어왔다. 당시만 해도 오는 6월 치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겨냥한 황당한 주장쯤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그러나 연말 들어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호남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김 장관을 위시한 정치권 주장의 핵심 근거는 '전기가 많은 곳'에 반도체 산단을 짓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김 장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에너지 고속도로를 확충해 산단으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이 산업화 상징인 경부고속도로를 연상케 한다"라며 "전기가 많은 호남 쪽으로 옮겨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있다"라고 밝혔다. 업계에선 이 발언을 ▲신재생 에너지 발전량이 풍부한 호남이 아니라 용인 클러스터에 팹(Fab)을 짓기 위해 별도 그리드를 구축하는 게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지방 차별 우려까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미 배가 떠났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이 세워진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SK하이닉스는 4개 팹 중 1곳의 가동을 코앞에 뒀고 삼성전자도 첫 삽을 뜨기 위한 준비를 마친 참이다. 이제 와서 이전 방안을 거론하는 게 사실상 정부 정책을 전면 취소하겠다는 발언에 가깝다는 반응이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민간기업은 물론 국내 메모리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 기대야 하는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로부터도 정부 신뢰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재·부품·장비 업체 등 배후 협력사 생태계나 에너지·용수 인프라 확보 문제를 떠나서 인재 확보 측면의 가시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도 함께 거론된다. 용인부터도 핵심 인재 남방한계선에 겨우 걸쳐 있는 지역으로 통하는데, 그 아래로 산단을 내려보내면 인재 유치가 불가할 게 뻔하다는 얘기다.
업계 한 실무자는 "삼성전자도 미국 팹에 파견한 인력들이 마이크론이나 인텔 등 현지 경쟁사 러브콜에 넘어갈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라며 "미국 체류비용부터 자녀 유학 문제까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도 업계 인재들에 열려 있는 상태다. 대형 마트 입점 같은 사소한 문제까지 정치적 반대에 가로막히는 지역에 어떤 인재가 가려고 할까 생각해보면 답이 정해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이 실현 불가능성을 모르지 않으면서 이 같은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작년 하반기부터 정부 주무부처나 지자체 차원에서 간담회를 통해 각계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현실적 어려움과 우려를 표하고 있음에도 장관까지 가세해 호남 이전을 주장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일단은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킨다는 반응이 우세하나 국내 반도체 산업이 슈퍼사이클에 들어간 상황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 규모가 올해부터 크게 불어날 게 뻔한 상황에서 일단 수용 불가한 주장부터 던져놓고 보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시장에선 양사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이 2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용인에서도 반도체 기업이 들어선다고 하니 환경영향평가나 주민 반발을 근거로 SK하이닉스에 막대한 청구서를 들이민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걸 새만금에서 다시 하라는 게 얼마나 곤란한 요구인지는 정치권이 더 잘 알 것"이라며 "여수 산단 석유화학 구조조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상당할 텐데, 반도체 업계에 계속해서 청구서가 날아들지 않을까 하는 시각이 있다"라고 전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대통령실 차원에서도 진화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8일 청와대 김남준 대변인은 반도체 클러스터를 전북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여권 일각 주장에 대해 "(정부는) 클러스터 대상 기업의 이전을 검토하지 않았다. 기업 이전은 기업이 판단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당일 이재명 대통령도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며 같은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