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보험 부담, 증권·운용사 기회…방안 따라 업권별 희비
“퇴직연금 국유화” 반대도…“구체안 나와야 판단 가능”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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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여당이 퇴직연금 기금화 추진에 속도를 내면서 금융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구체적인 윤곽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금융사들은 ‘기대 반 의심 반’의 시각 속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대응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제도 설계 방향에 따라 업권별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릴 수 있다는 점에서 퇴직연금 기금화는 금융권 전반의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16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증권사 등 금융사들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퇴직연금 기금화 방안과 관련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대응 준비에 나서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추진 방안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이달 내 관련 내용이 발표될 경우 내부 조직 구성 등을 통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방침이다.
앞서 이달 7일 국회에서 열린 경제성장전략 당정협의회에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장은 “퇴직연금 기금화와 관련해 용역을 진행 중이며, 1월 중 별도로 실무당정과 고위당정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속도감 있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올해 새롭게 떠오른 이슈는 아니다. 이전 정권들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돼 온 의제인 만큼, 이번에도 현실화 가능성에 물음표를 두는 시각은 여전히 적지 않다.
다만 퇴직연금 기능 강화가 이재명 정부의 123대 국정과제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는 정부의 추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부터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관련 논의를 이어왔다.
이에 금융권에서는 올해 상반기 중 구체적인 방안이 확정되고 법제화가 이뤄질 경우, 하반기부터는 일정 부분 제도가 시행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렇게 되면 퇴직연금 기금화는 올해 금융권의 최대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퇴직연금 시장은 2024년 기준 432조원 규모로, 2019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연 10% 성장률을 가정하면 2035년 전후로는 시장 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시장 규모가 워낙 큰 만큼 금융사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며 “이달 내 구체적인 추진 방안이 제시될 경우 즉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 가운데 퇴직연금 기금화와 관련된 법안은 모두 3건이다. 각 법안의 내용이 상이한 만큼, 어떤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되느냐에 따라 금융사 업권별 대응 전략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한정애 의원안은 사용자가 수탁법인을 직접 설립해 퇴직연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아울러 현재 30인 이하 사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푸른씨앗’ 적용 범위를 100인 이하 사업자로 확대하는 방안도 담겼다.
박홍배 의원안은 정부가 퇴직연금공단을 설립해 기금을 운용하는 공기관 기금형 모델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퇴직연금공단이 근로복지공단의 푸른씨앗을 이관받는 구조로, 국민연금공단과 유사한 성격의 공적 기금 운용기관이 새로 설립되는 셈이다.
안도걸 의원안은 퇴직연금기금 전문운용사를 설립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사업자가 전문운용사를 설립해 외부 위탁 운용을 하도록 하고, 푸른씨앗은 모든 중소기업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골자다. 동시에 근로복지공단 내에 퇴직연금기금 전문 운용 조직을 두도록 해 공공과 민간의 역할을 병행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시장에서는 한정애 의원안처럼 수탁법인을 두는 구조가 도입될 경우, 사실상 OCIO(외부위탁운용) 비즈니스와 유사한 형태로 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도걸 의원안처럼 금융사가 자체 운용 역량을 갖추는 방식이 채택되면 자산운용사와 증권사 등 다양한 주체의 참여가 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은행·보험 중심의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구조 변화에 부담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자산운용사나 증권사의 OCIO·연금 운용 조직에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기금화 추진 계획 발표 이후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퇴직연금 기금화 추진 반대에 관한 청원’이 게시되는 등 반대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제시할 구체적인 안을 확인한 이후에야 평가가 가능하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현 시점에서 앞선 논의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로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으며, 설령 기금화가 추진되더라도 단기간 내 강제 도입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과 기금형을 병행하면서 근로자와 사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식이 유력하고, 시행 초기에는 기금형을 소규모로 도입한 뒤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퇴직연금의 약 90%가 기금형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는 국내에서도 기금형 비중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다만 이는 수년에 걸친 점진적 전환의 결과로, 당장 시장 구조가 급변하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이런 배경에서 국민연금공단과 유사한 성격의 공적 기금 운용기관을 신설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방안은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공적 기금 중심 모델은 반대 여론이 제기하는 ‘퇴직연금 국유화’ 논란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결국 민간이 중심이 되는 기금화 모델이나, 가입자가 원하는 형태의 기금을 선택할 수 있는 절충안이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가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배경에는 시장 규모가 크게 성장했음에도 수익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82.6%가 예금 등 원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는 구조적 특성상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고, 최근 5년간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2.86%로 국민연금 평균 수익률(8.13%)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이 때문에 정부는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기 위해 현행 제도를 보완할 정책적 제고 방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기금화가 추진되고 민간 운용사가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경우 금융권 내 이해관계 변화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의 점유율과 구도를 고려하면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에는 새로운 수익원이 열리는 반면, 은행이나 보험사 등 기존 원금보장형 상품 중심의 금융사들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축소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업권별로 기금화에 대한 입장 차이도 더욱 뚜렷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는 반복돼 온 사안인 만큼, 실제로 얼마나 구체화되고 추진되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금융사들 간 이해관계가 달라 그동안은 은행권의 반대가 제도 도입을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는데,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등 비은행권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제도화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