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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퇴직금을 잠시 예치했다가 일시금으로 찾아 쓰는 '정거장'으로 인식됐던 IRP 계좌의 위상이 변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 시기와 맞물려 IRP를 실제 연금 수령 계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27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최근 일선 창구에서 IRP 계좌를 해지하지 않고 연금으로 전환하려는 문의가 늘고 있다.
과거 부모 세대가 퇴직금을 자녀 교육이나 주택 마련 등 목돈으로 한꺼번에 소진했던 것과 달리, 현 은퇴층은 노후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는 설명이다. 특히 대기업 임원이나 고소득 전문직 등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관계자는 "자산 규모가 클수록 일시금 수령 시 발생하는 퇴직소득세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에, 이를 30%가량 줄일 수 있는 연금 수령의 절세 혜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목돈을 한 번에 찾기보다 계좌 내에서 운용 수익을 계속 누리며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려는 니즈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현장 분위기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4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2024년 퇴직연금 수령을 시작한 계좌 중 수령방법을 일시금 대신 연금으로 택한 비율은 13%(7만4000좌)다. 여전히 절대 다수가 일시금을 선호하지만, 해당 비중은 2022년 7.1%, 2023년 10.4%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특히 금액을 기준으로 보면 고소득자의 선호가 뚜렷하다. 2024년 전체 퇴직급여 수령액 중 연금으로 지급된 금액의 비중은 57%에 달해, 일시금 수령액 규모를 앞질렀다. 금액 기준 연금 수령 비율은 2022년 41.9%, 2023년 49.7% 등으로 상승세다.
연금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건 정부와 증권업계 모두에게 긍정적인 신호다. 정부 입장에서는 퇴직연금이 일시에 인출되지 않고 시장에 머물 경우, 장기적인 증시 부양 효과와 함께 국민의 노후 소득 안정을 꾀할 수 있다. 이에 당국은 최근 증권사 등 사업자들에게 실질적인 연금화 비율 관리를 요구하며 연금화를 독려 중이다.
증권업계 역시 연금화 확대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고객이 IRP를 단순 '정거장'으로 쓰지 않고 연금을 수령하게 되면, 해당 자산은 증권사가 지속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증권사 IRP는 ETF, 리츠 등 다양한 실적배당형 상품을 통해 적극적인 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고액 자산가들을 붙잡고 있다. 가입자가 연금을 선택하면 수령액을 제외한 나머지 잔액은 계좌에 남아 계속 운용되는데, 이때 증권사는 은행 예금보다 높은 '알파' 수익률을 제시하며 자산을 은퇴 후에도 능동적으로 관리하려는 투자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은행권 역시 IRP 수익률을 끌어올리며 증권사를 맹추격하는 양상이다. 실제 지난해 일부 구간에서는 은행 IRP 수익률이 증권사를 상회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연금화 시장이 커질수록 고객을 붙잡기 위한 업권 간 수익률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며 "결국 장기적인 관점에서 누가 더 매력적인 포트폴리오를 제시하느냐가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실무적인 고충도 교차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퇴직금의 수령 방식을 금융사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현재로서는 세제 혜택과 수익률 등의 안내를 통해 연금화를 유도하는 게 최선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경우 퇴직연금을 중도 해지하거나 일시금으로 수령할 때 일정 부분 페널티를 부과해 연금 유지를 돕는 장치가 있다"며 "우리나라도 연금 수령 시의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등 장기적 관점에서 제도를 보완해 나가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