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초 SK하이닉스 성과급 이야기는 반도체 업계뿐 아니라 금융권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실적 개선에 따라 지급된 성과급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에 달했기 때문이다. 연봉 1억원 안팎 직원이라면 성과급만 1억원을 넘길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왔다.
하지만 금융권이 더 흥미롭게 지켜본 장면은 성과급 액수 자체가 아니었다. SK하이닉스가 운영 중인 경영성과급 DC(확정기여) 제도였다. 이 제도는 성과급 일부를 퇴직연금 DC 계좌로 적립할 수 있도록 한 방식이다.
성과급을 현금으로 받으면 근로소득세가 적용돼 세 부담이 크게 늘 수 있다. 반면 DC 계좌로 적립하면 과세가 이연되고 퇴직 시점에 퇴직소득세가 적용되는 구조라 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성과급을 어디로 받을 것인가'가 하나의 선택지가 됐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번 성과급과 관련해 약 2만2000명의 SK하이닉스 임직원이 DC 계좌 적립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임직원 약 3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이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SK하이닉스의 경영성과급 DC 사업자 목록에는 증권사와 은행, 보험사를 포함해 십여 곳의 회사가 이름을 올렸다. 수천억원 규모 자금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다는 기대에 사업자 간 물밑 경쟁도 상당히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회사 측은 경쟁 과열을 우려해 금융회사들의 마케팅 활동을 상당 부분 자제시키고 임직원들이 직접 사업자를 선택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금융권에서는 이번 선택이 퇴직연금 시장의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 1위 사업자인 삼성생명을 선택한 인원은 100명대 수준에 그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미래에셋증권을 선택한 인원이 약 1만명 수준으로 가장 많았고, 삼성증권과 NH투자증권 등 다른 증권사들도 상당한 선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SK하이닉스 사례가 퇴직연금 시장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퇴직연금 시장은 오랫동안 은행과 보험사가 강세를 보여왔다. 원리금보장 상품 중심의 안정적인 운용 구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전체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 상위권도 생명보험사와 은행들이 차지해왔다.
하지만 DC형 시장이 커지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DB형은 회사가 운용 구조를 상당 부분 결정하지만 DC형은 가입자 개인의 선택권이 훨씬 크다. 개인이 직접 금융회사를 선택하는 구조가 되면서 ETF, 펀드, 투자 플랫폼 등을 갖춘 증권사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가 숫자로 드러난 사례가 SK하이닉스였다"라며 "개인이 직접 선택하는 DC 시장이 커질수록 금융회사 간 경쟁 구도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사례 하나만으로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DB형 시장은 크고, 중소기업 퇴직연금에서는 보험사와 은행의 영향력도 작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이제 퇴직연금은 '어느 회사에 맡길까'가 아니라 '어디에 투자할까'를 고민하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 임직원 2만2000명의 선택은 그 변화를 숫자로 보여준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