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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AI 생성 이미지(편집)
"지금은 이벤트 드리븐(Event-driven;사건 주도) 장세도 아니고, 헤드라인 드리븐(Headline-driven;뉴스 주도) 장세다. 예측이 무의미하다. 장기 전망은 자제하고, 그때 그때 대응만 한다는 생각으로 시장을 지켜보고 있다." (한 증권사 프랍 트레이더)
지난 9일 미국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장중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여파로 공급 부족 우려가 극에 달했던 2022년 3월 이후 처음이었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하며 주변국과 상선을 공격하고 있다는 뉴스에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날 코스피 지수는 6% 가까이 급락했고, 원달러환율은 1480원대로 치솟았다.
11일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조기 종결과 세계 주요 7개국(G7) 전략비축유 공동 대응을 시사하며 배럴당 90달러대로 안정되는 모습이었던 WTI 가격은 미군 군함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을 보호하고 있다는 뉴스에 70달러대까지 급락했다가, 백악관이 이를 전면 부인하며 다시 80달러대 중반으로 치솟았다.
지난달 28일 발발한 이란 전쟁의 여파가 국내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 경제로까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전쟁이 조기 종결 될 것이란 낙관론과 미국이 관여했던 이전 중동 전쟁과 비슷하게 수렁에 빠질 것이란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뉴스 속보 한 줄에 조 단위 자금이 움직이는 예측불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핵심 변수는 결국 이란과 오만 사이에 위치한 호르무즈 해협의 정상화 여부다. 하루 평균 1900만배럴의 원유가 통과하는 요충지로,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지금의 극심한 변동성은 결국 국제 유가 변동성에 따른 후폭풍이라는 점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정상화가 '언제', '어떻게' 되느냐에 관심이 모인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지난 9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 수출량은 400만배럴로 평시의 20% 수준까지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4일 평균은 160만배럴이었다. 일부 선박이 트랜스폰더(위치 신호 장치)를 끄고 몰래 항행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긴 했지만, 실제로 수출량 역시 회복되고 있음이 일정 부분 확인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동서파이프라인을 통해 서쪽의 얀부로 원유를 이송, 홍해를 통해 원유를 수출하는 방안도 실현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10일 현재 얀부로 최소 25척의 유조선이 이동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방(UAE) 역시 푸자이라 터미널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 원유를 수출하는 방안을 준비중이다.
한 증권사 시황 담당 연구원은 "배럴당 100달러 넘게 급등했던 국제 원유 가격이 80달러선까지 안정된 건 호르무즈 해협 대체 수송망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미국이 해협 봉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며 "다만 실제로 원유 물동량이 이전 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지속적으로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상품시장 관계자들은 얀부의 원유 수출 능력이 기대치인 하루 700만배럴이 아니라 하루 300만~400만배럴에 불과할 것이라는 회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예멘 후티 반군 역시 '홍해 항로 및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겠다'고 밝힌 상태라 얀부가 안전한 우회항로가 아니라는 인식도 적지 않다.
이란이 강경파인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차기 지도자로 선출한 것은 장기전 체제를 준비하는 움직임이란 관측이 주류다. 이란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뺏기긴 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상군을 투입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권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다는 평가다. 이란이 주변국 에너지 인프라를 간헐적으로 공격하며 기뢰 등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을 방해할 경우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국내에 미칠 영향이다. 에너지 수입국인 한국은 국제 유가로 인한 에너지 위기에 취약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전쟁 발발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스피에서만 10조원을 순매도했다. 전쟁 이후 처음 장이 열린 3일 하루에만 5조4000억원을 내다팔았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한국 전력 발전 중 천연가스(LNG) 비중이 30%에 달하는데, LNG 수입선이 막히면 반도체 생산에도 차질을 빚지 않겠느냐는 해외 투자자 문의가 있었다"며 "헬륨 등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특수가스 역시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이라 사태가 장기화하면 국내 핵심 산업인 반도체에도 영향이 없을 순 없다"고 말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금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 9일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장중 3.80%까지 치솟으며 2023년 1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2월 초 금리 급등 당시 최고치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 불안을 초래하며 기준금리 인하는커녕 기준금리 인상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신중론이 득세한 까닭이다. 2월 들어 안정화 국면이었던 환율 역시 단숨에 1500원선 근처로 치솟으며 수입 물가 상승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 증권사 전략 담당 연구원은 "이란 전쟁으로 인해 지난해 말 경제 및 증시 예측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당장 국제 유가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 1년 이상 걸릴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라 의견을 내기도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3일 자료를 통해 국제 유가 연평균 150달러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올해 연간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 수준인 연 1%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소비자물가는 2.9%포인트 상승하고, 경상수지는 767억달러(약 113조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