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AI 생성 이미지(편집)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가 본격 집행 국면에 들어서면서 자본시장 곳곳에서 '정책자금 대기열'이 형성되고 있다. 기업들은 저금리 자금 지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투자 프로젝트를 들고 줄을 서고 있고, 금융지주들은 생산적금융 실적을 채우기 위해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자(子)펀드 출자 공고를 기다리며 투자 일정 조정에 나선 모습이다. 국민성장펀드가 실제 자금 집행 단계로 넘어가기도 전에 시장의 투자 흐름과 일정이 먼저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될 만한 딜' 들고 정책자금 문 두드리는 기업들
올해 1월 신안우이 해상풍력 발전사업이 먼저 자금공급 승인을 받았고, 2월 말에는 삼성전자 평택 5라인(P5) AI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프로젝트에 2조5000억원, 이수스페셜티케미컬 울산 차세대 이차전지 소재공장에 1000억원의 저리대출이 의결됐다. 제도 설명 단계에 머물던 국민성장펀드가 실제 돈이 나가는 사업으로 전환되는 국면이다.
이후 시장은 자연스럽게 다음 순번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미 공개된 7개 주요 프로젝트를 두고서도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 "어느 트랙으로 실적을 쌓느냐", "올해 안에 잡힐 물량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시장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기업들이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은 국민성장펀드를 새로운 조달 옵션으로 올려놓고 투자 구조를 재검토하는 분위기다. 이차전지, 바이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소부장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업종에서 이런 흐름이 두드러진다.
통상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5000억원 이상이 필요한 투자라면 2~3%대 정책성 자금 조달 가능성만으로도 프로젝트 구조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민간 자금만으로는 조달 비용이 높거나 투자자 설득이 쉽지 않았던 기업일수록 관심이 크다.
투자업계에서는 SK넥실리스의 3000억원 규모 전환우선주(CPS) 조달 건도 국민성장펀드와의 접점을 검토한 사례로 거론된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런 개별 건들이 곧바로 집행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우선순위와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순번을 기다리는 구조라는 인식이 강하다. IB업계에서는 SK넥실리스 관련 구조가 올해 하반기 이후에야 윤곽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 대형 PEF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 취지에 맞는 딜을 산업은행에 가져가도 당장 먼저 검토해야 할 에너지 인프라 건들이 여럿 있다는 분위기였다"며 "올해 집행분은 사실상 상당 부분 윤곽이 잡혀 있고, 나머지 기업들은 순번을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에는 국민성장펀드가 일종의 '시간 벌기'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민간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은 기업들이 정책자금 가능성을 근거로 투자 일정 조정을 시도하는 사례도 포착된다는 것이다.
인프라 투자 확장세…금융지주는 '실적 채우기' 고민
국민성장펀드는 대형 인프라 투자와 결합하는 방식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 관련 투자에서는 국민성장펀드와 민간 인프라펀드 자금을 결합하는 구조가 논의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KB금융이 조성한 약 1조원 규모 인프라펀드 가운데 약 5000억원이 투입되는 방안이 유력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가 들어가면 민간 자금 유치 구조도 훨씬 수월해지는 측면이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추고 투자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지주와 은행, 보험 등 LP 성격의 기관들은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이들에게 국민성장펀드는 단순한 정책 협조를 넘어 생산적금융 실적과 맞물린 과제가 됐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중소기업 대출까지 포함해 생산적금융의 외형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첨단전략산업 관련 인프라나 시설투자는 대부분 실적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는 분위기다. 전력·신재생에너지·난방 인프라, 데이터센터, 공장 설비투자 등이 주요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요즘은 첨단전략산업을 위한 시설투자면 대부분 생산적금융으로 보는 분위기"라며 "국민성장펀드와 생산적금융을 묶어 집행하려는 구상도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실적과 수익성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전자 평택 P5 지원만 봐도, 금융권 안에서는 "원래 삼성은 자체 자금으로도 충분히 추진할 수 있었던 투자"라는 말이 적지 않다. 정책금융 상징성을 위해 시중은행까지 참여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지주들은 국민성장펀드 건수와 생산적금융 목표를 채우기 위해 시설대출과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저리 구조가 강해질수록 마진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삼성 P5처럼 상징성이 강한 사업은 참여 의미가 있지만 수익은 결국 다른 투자에서 보전해야 하는 구조"라며 "정책 참여와 수익성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출자사업 공고만 기다리는 PEF…"VC가 더 유리할 수도"
PEF 업계의 셈법은 더 복잡하다. 우선 간접투자 영역에서는 자펀드 운용사 지위를 노리는 하우스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하우스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아니다.
최근 펀드 결성을 시작했거나 산업은행 내부에서 국민성장펀드 운용 방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운용사들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다수 PEF들은 자펀드 공고와 기준을 기다리며 대응을 미루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산업은행이 내달 중 국민성장펀드 관련 출자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학연금도 당초 계획보다 출자 공고 시점을 늦춰 산업은행 일정에 맞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일부 공제회 역시 조직 개편 등의 영향으로 일정이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일부 PEF들은 투자 검토 중이던 딜을 잠시 멈추는 모습도 나타난다. 국민성장펀드 지원 대상이 될 경우 투자 구조와 조건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PEF 업계에서는 국민성장펀드가 사모투자 시장에 특별히 유리한 구조는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혁신기업 투자를 확대하는 정책 방향을 강조하면서 벤처투자(VC) 시장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이야기다.
한 중견 PEF 관계자는 "신규 자금이 크게 늘어난 것이라기보다 산업은행 기존 정책자금이 국민성장펀드 틀로 재편된 측면이 있다"며 "오히려 이번 정책 환경에서는 벤처캐피탈 쪽이 더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현재 자본시장에서 국민성장펀드는 거대한 성장 사다리이자 동시에 건수와 순번의 게임이 되고 있다. 기업들은 기대를 안고 찾아오고, 금융지주들은 실적 인정과 수익 확보 사이에서 선별적으로 참여한다. PEF들은 자펀드와 직접투자 트랙을 두고 입지를 넓히려 한다.
시장 참가자 대부분은 국민성장펀드의 정책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고 있다. 다만 현장의 공기는 산업 생태계 육성이라는 장기 목표보다 "올해 안에 어떤 건수가 잡히느냐"는 단기 경쟁에 더 가까운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