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전력시장 민낯 들춰낸 중동사태…한전 '적자' 땜질처방 언제까지?
입력 2026.03.12 07:00

한전, 적자 산업계 전가 후 일부 양보 고민 중에
중동發 에너지 쇼크로 무색해진 요금개편 논의
AI·반도체로 산업구조 재편까지 차질 빚을까 우려
전력시장 개편에 중동 리스크 우회까지 모색 필요
한전 자본 보강·비용구조 합리화 없이 달성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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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중동 사태는 한국 전력시장 왜곡과 에너지 수급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동시에 들춰냈다. 전력시장 개편 없이 요금정책으로 버텨온 상태에서 산업구조 전환과 에너지 수급 다변화까지 동시에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당분간 지정학 불안이 이어질 전망인 가운데 늘어날 비용에 대한 부담 우려가 각계에서 나온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쟁 종료 가능성을 시사하고 G7도 전략 비축유 공동방출 소식을 내놓으며 국제유가가 다소 안정되고 있다. 전일 장중 배럴당 120달러까지 치솟았던 서부텍사스유(WTI) 선물 가격은 10일 배럴당 87달러선까지 하락했다. 유가가 떨어지자 국내 주식시장 역시 전일 하락폭을 되돌리며 반등했다. 

    일단 시장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10일 오후 들어 WTI 선물가는 배럴당 90달러 안팎을 오가고 있는데, 당장 전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완전 봉쇄 가능성까지는 반영하지 않은 수준의 가격대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란이 전면전 없이도 해상 물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만큼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는 목소리가 많다. 

    전쟁의 장기화 여부를 떠나서 이번 사태로 국내 전력시장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정부가 이달 내 마무리하려고 했던 전기요금 체계 개편부터가 무색해졌다는 평이 나온다. 당초 산업용 요금 부담을 일부 낮춰주되 지역·시간대별로 차등 요금제를 도입하는 게 개편안의 골자였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거나 막 돌입한 석유화학·철강·2차전지 등 전력 집약적 산업들의 원가 부담을 고려하면 한국전력공사가 수익성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이 같은 방향으로 개편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컸다. 그러나 배럴당 60달러 선에 머물던 유가가 순식간에 100달러를 넘보게 되며 상황이 뒤집혔다. 

    발전 원가가 치솟으면 한전의 양보로 산업계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시장에선 한전이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처럼 전력 도매가격(SMP) 급등으로 적자에 처할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다. 그간 요금 인상으로 한전의 이익 체력이 나아진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생산이 제때 정상화하지 못하거나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이상에 머물 경우 연료비나 전력 구매비 부담이 치솟으면서 또 과거 상태로 회귀할 가능성이 커진다.  

    가격 변동 리스크를 한전이 홀로 떠안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요금체계 손질로 버텨온 한계가 재확인됐다는 진단이 나온다.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2022년 한전 적자가 33조원이었는데 정부가 정치적 부담이 큰 주택용 전기료는 못 올리고 산업계 요금을 70% 이상 끌어올려서 땜질처방을 해왔다"라며 "유가가 60달러 이하로 안정되고 SMP가 떨어져서 한전 이익이 치솟으니까 이걸 일부 돌려주겠단 게 이번 요금 개편이었는데, 전쟁이 또 터지면서 전부 도루묵이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 산업구조가 이미 대규모 전환기에 돌입한 상태라는 점이다. 

    투자업계에선 현재 에너지 불안이 신산업에 미칠 영향을 더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 각지에 추진 중인 AI 데이터센터(DC) 프로젝트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존 제조업보다 전력 집약도가 더 높다. 막대한 추가 전력 인프라를 확보하지 못하면 적기에 산업구조 전환이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앞으로 민관 합동으로 2~3년 내에 원자력 발전이나 LNG 발전 비중을 확대하는 동시에 각지 클러스터를 연결할 수 있는 송배전망 설치까지 마쳐야 한다"라며 "제때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면 엔비디아가 약속한 가속기(GPU) 공급 요청도 힘들고, 자체 AI 인프라 확보나 반도체 신규 클러스터 구축, 자율주행, 로보틱스 등 신산업 계획이 줄줄이 차질을 빚게 된다"라고 말했다.  

    자연히 중동 의존도가 높은 국내 에너지 수급기반부터 전력시장 생산·판매구조까지 순차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원래도 수급처 다변화나 신규 발전원, 송배전망을 구축하는 작업 대부분에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는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불안까지 보태진 모양새가 됐다. 

    대기업 그룹사를 비롯해 국내외 사모펀드(PEF) 운용사까지 적지 않은 민간자금이 전력 인프라 시장 참여를 준비하고는 있다. 그러나 국내 전력시장 최종·단일 구매자 격인 한전 자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체 투자 사이클이 제대로 굴러가기 어렵다는 진단이 많다. 전력시장의 전반적인 신뢰도나 투자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최종 수요자 역할을 하는 한전이 재무안전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인프라업계 한 관계자는 "민자발전 대부분이 LNG 발전이 될텐데 이쪽 시장은 운반선이나 터미널 등 물리적 병목도 크고 지금처럼 공급 차질이 걱정될 때는 비용이나 수익성 부담이 커진다. 그러면 죄다 한전을 쳐다보게 될 것"이라며 "연료 수급부터 전력 생산, 판매나 인프라 투자 전반에서 각 참여자가 비용 부담을 나눠 질 수 있는 구조로 효율성을 끌어올려야 한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