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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의 현금 쌓이는 속도가 투자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슈퍼사이클)에 들어서면서 투자를 늘려도 현금이 더 빠르게 쌓이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업보고서와 함께 대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을 내놓은 것도 이런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10일 삼성전자가 공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연결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57조8563억원으로 집계됐다. 단기금융상품 67조9650억원을 포함하면 유동성 자산은 약 126조원에 달한다. 직전 분기 108조원과 비교하면 1개 분기에만 20조원 가까운 현금이 곳간에 들어찬 상황으로 분석된다.
국내외 증권가에서는 1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규모는 45조원 안팎으로 불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작년 연간 영업이익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올해 연간 영업이익 규모는 200조원 안팎 전망이 보수적인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매달 메모리 가격은 예상을 훌쩍 넘겨 치솟는데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실적은 아직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투자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사실상 현금을 찍어내는 구조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상반기 16조원 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을 사업보고서에 기재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조치라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재무구조를 단순 가정으로 계산해보면 이런 고민의 배경이 더 분명해진다.
삼성전자는 지난 3년 동안 한해 약 50조원 안팎의 설비투자(CAPEX)를 집행해왔다. 업황이 부진한 시기였지만 현금성 자산도 100조~120조원 수준을 유지해왔다. 원래도 투자를 지속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현금이 쌓이는 구조였다.
최근 업황과 증권가 분석대로 연간 영업이익 규모가 200조원 구간에 돌입한다면 현금 쌓이는 속도는 갈수록 가팔라질 전망이다. 올해 삼성전자의 CAPEX 규모를 70조원으로 가정하더라도 연간 잉여현금흐름(FCF)은 약 170조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 이 경우 올해 연말 기준 현금성 자산은 260조원에서 270조원까지 증가한다. 회사 내부에 한해 140조원 이상 현금이 추가로 쌓이는 구조다.
더 이상 개별 기업 재무 수준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까지 나온다. 삼성전자는 보유 유동성의 절반 가량을 단기금융상품으로 굴려왔는데, 위 가정에 대입하면 연간 금융수익 규모 역시 20조원에 육박할 수 있다. 회사 현금흐름이나 보유 현금 규모, 운용 수익이 국가 재정이나 글로벌 투자은행(IB)과 단순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지는 셈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원래도 주주에게서 현금을 너무 많이 쌓아두는 걸 지적 받아왔는데 지금 현금 쌓이는 속도를 회사 내부에서도 믿기 힘들어하는 분위기"라며 "통상적인 자본정책으로는 쌓이는 현금을 다 소화하기 어려운 형태로 재무구조가 바뀌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메모리 공급부족이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삼성전자가 CAPEX를 무한정 늘이기는 어렵다. 메모리 산업이 종전 경기순환적 구조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투자를 급격히 늘렸다가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부메랑이 크게 돌아올 수 있다.
메모리 외 파운드리(비메모리 위탁생산) 투자도 크게 늘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반도체 기업의 전체 CAPEX 규모가 직전 해보다 50%를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나서는 방법도 있지만 그래도 현금을 다 쓰기는 어려울 거란 평이다. 50조원 규모 빅딜을 단행해도 현금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라는 얘기다.
상반기에만 16조원어치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한 것도 결국 이런 고민이 일부 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투자가 현금 쌓이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만큼 남는 몫을 두고 주주환원 확대 압박이 커질 개연성이 높아서다.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새로운 3개년 주주환원 정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정부가 올해 도입한 배당소득 분리과세 제도에 발을 맞추기 위한 고민이 한창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감안하면 상반기 16조원 자사주 소각이 전초전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업황 불확실성을 감안해서 배당도 단계적으로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 소각하는 방식으로 현금 쌓이는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본다"라며 "그래도 현금이 남을 것 같은데, 보유 현금성자산이 200조원까지 불면 국내 금융시장 유동성 공급자 역할도 할 수 있다. 최근 채권 투자 가능성도 그런 맥락에서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