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3월은 주주총회 시즌이다. 주총에서 경영권을 찬탈 또는 방어를 위한 전쟁을 치러야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간신히 정족수를 넘겨 무사히 주총을 마치는 게 목표인 곳도 있다. 사정은 각기 다르지만, 절반이 넘는 주주들이 참석해 안건에 따라 일반결의(50%이상 동의) 또는 특별결의 요건(66.7% 이상 동의)을 충족해야하는 건 마찬가지다.
슈퍼주총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재, 더 많은 우호주주를 주총에 끌어들이기 위한 위임장 확보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부턴 3차 상법개정안이 시행된다. 기업들은 2명 이상의 감사위원을 분리선출 해야하는데, 대주주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되는 게 개정 상법의 요지다. 외부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우호지분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에 의결권 위임을 대행하는 업체들은 뜻밖의 호황을 맞고 있다.
의결권 위임을 대행하는 업체들의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외감법인으로 등록돼 연 매출이 수 십억원에 달하는 곳이 있는 반면, 소수의 인원들로 영세하게 운영되는 업체도 있다.
수익 구조는 단순하다. 개별 주주들에게 접촉해 위임장을 받고, 위임 받은 주식 한 주 당 일정수준의 보수를 받는 식이다. 통상적으론 위임 주식 한 주 당 100~200원 수준. 대규모 지분 확보가 필수적인 기업은 위임장을 받아온 주식의 비율만큼 보수를 지급한다. 대략 1%의 지분을 모아오는데 2억원에서 4억원가량으로 전해지는데 협상을 통해 최종 계약서를 작성한다. 경영권 분쟁이 첨예한 양상을 띄는 기업들의 경우엔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재계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주총이 펼쳐졌던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위한 주총이 열렸을 당시만해도 의결권 위임은 사내 직원들의 몫이었다.
당시 삼성물산 직원들은 합병에 찬성하겠단 위임장을 받기 위해 각자 손에 '수박' 한 통씩을 들고 주주들을 찾아나섰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천 명 이상의 직원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수박을 들고 있던 삼성직원들의 장면은 당시 삼성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돼있다.
주총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소액주주들의 몸 값이 상승하기 시작한 건 약 10년전부터다.
2017년, 주총에 불참한 주주들도 주총에서 나온 찬반 비율대로 투표한 것으로 간주하는 섀도우보팅(Shadow voting) 제도가 폐지됐다. 해당 제도는 상장회사의 정족수(주주참석 50% 이상)가 미달돼 주총이 무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로 도입됐지만, 주주들이 참석하지 않아도 주총이 열리는 등 '주총의 형식화'가 심해지면서 결국 사라지게 됐다.
이후부터 의결권 위임 대행사들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주주권익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주의펀드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해당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과거 한진칼의 경영권 분쟁부터 최근 고려아연 공방전까지, 의결권 위임 대행사들은 갈등이 있는 기업들에 주변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최근 상법의 개정은 단순히 경영권 분쟁 기업들뿐 아니라 대다수의 기업들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 집중투표제와 3%룰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사측과 의견이 다른 외부 인사가 경영에 관여할 여지는 급격히 커지게 된다.
외부 인사가 이사진에 진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근 기업의 IR 담당자들이 주요 기관투자가를 찾아 사측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져줄 것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기관보다 소액 주주들의 비중이 높은 기업들 또는 삼성그룹과 같이 주총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기 어려운 기업들은 결국 의결권 위임 대행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전자주주총회제도는 주주들이 위탁업체를 통해 의결권 대리 행사를 하지 않더라도 주총에 참석할 수 있는 제도이다. 내년 1월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들은 의무적으로 도입해야한다. 아직은 도입률이 낮을뿐더러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투자자들에겐 접근이 어려운게 사실이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의결권 대리행사를 권유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결권 행사 대행은 주총의 원활한 진행을 가능하게 하고, 이런저런 제약으로 인해 주총에 참석하지 못하는 주주들에게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들이 있다. 연락처, 주소, 보유주식 등이 담긴 주주명부는 상당히 민감한 개인정보에 해당한다. 주주라도 할지라도 기업의 주주 명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법원에 '주주명부 열람 및 등사 가처분'을 신청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돼선 안되는 민감한 정보란 의미이다. 과거 내부 직원들이 동원된 2017년 삼성물산 임시주총 당시에도 개인정보 유출과 편법 수집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었다.
최근 경영권 분쟁을 펼치고 있는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측과 MBK·영풍은 의결권 대리 행사를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고려아연은 MBK·영풍 측의 대행사 직원 일부가 주주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고려아연 직원으로 오인될 수 있는 형태를 취했다며 경찰에 고발했다. MBK·영풍 측은 'MBK·영풍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자'로 적시된 대행사 측 직원의 명함까지 공개하며 강력 반발했다.
분쟁 기업의 경우엔 이해관계가 얽힌 당사자들이 모두 주총에 참석해 위임장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이 과정을 통해 중복된 표를 걸러내기도 한다. 정족수만 넘겨 주총을 무사히 마치는게 목표인 기업들은 위임장을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위조 위임장'이 등장할 수 있단 우려도 적지 않지만,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막을 방안이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