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업들이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며 화이트칼라 전문직의 업무 방식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나 기업금융(IB) 부서에서는 문서 기반 업무를 AI로 처리하는 사례가 늘었다. 과거에는 업무가 늘면 인력을 충원했지만, 이제는 기존 인력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분위기다. 로펌 역시 판례 검색, 계약서 초안 작성 등은 AI로 처리하고 있다. 자체 서비스 개발이나 외부 솔루션 도입 경쟁도 한창이다. 업무 효율성이 높아지자 시간 단위로 보수를 받아온 로펌들은 수임 방식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회계법인도 상황이 비슷하다. 특히 회계사는 반복 업무 비중이 높은 만큼 AI 고도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직군으로 꼽혀왔다. 주요 회계법인들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AI 서비스 개발에 적지 않은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삼일회계법인은 AI 챗봇 'AI Accountant'를 도입했다. 삼정회계법인은 스마트 감사 플랫폼 'KPMG Clara'에 생성형 AI 기능을 접목했고, 감사 자료 검색 시스템인 'AuditSay'에도 개발했다.
다만 업무 효율이 높아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업무 강도는 예년보다 더 높아졌단 평가다. 특히 감사팀의 업무량이 과중돼있단 목소리가 많다.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12월 결산 법인의 사업보고서 제출과 감사 절차가 집중되는 시기다. 감사팀 업무 강도가 가장 높은 시즌으로 꼽힌다. 이런 시즌을 감안해도 올해는 유독 부담이 더 크단 이야기가 나온다.
파트너들은 AI 활용을 통해 감사 투입 시간을 줄이겠다는 조건으로 수임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AI 도입 초기 단계에서 기대만큼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사 조서와 과거 자료 등을 AI에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업무 시간이 늘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 회계법인 감사팀 직원은 "자체 AI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고객들 조서를 AI에 학습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업무 시간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며 "AI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 학습은 계속 시켜야 하는데 성능은 기대에 못 미치고, 일은 늘어나는데 타임은 줄여 쓰라고 하니 무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그는 이어 "AI로 타임이 줄어들면 그만큼 페이백 해준다는 식으로 수임도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실제 고객들의 요구도 있는 데다 주요 회계법인들이 모두 AI 도입 경쟁에 나서고 있어 수임 방식 변화는 불가피한 선택이란 시선도 있다. 다만 AI 성숙도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업무 환경부터 바꾸려 하다 보니 현장에서 잡음이 나온다는 지적이다.
기저에는 회계법인 간 수임 경쟁도 자리한다. 감사 서비스의 차별화가 크지 않은 만큼 결국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감사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AI 활용을 내세우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평가다. 저가 수임 경쟁의 부담은 실무진에게 집중됐고, 최근 들어 감사팀 퇴사도 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회계법인들이 이를 오히려 구조조정의 계기로 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AI 고도화로 인력을 줄일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매년 배출되는 CPA 합격자를 일정 수준 채용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인력 이탈이 자연스럽게 인력 구조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회계업계 관계자는 "회계법인 입장에서는 일정 규모의 채용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부 인력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구조라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며 "최근 퇴사가 늘면서 인력 조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실무진들의 고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다른 회계법인 감사팀 직원은 "지금은 AI를 문서 찾아보는 정도로 활용하는 수준이라 실제 감사 업무에서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고 체감하기 어렵다"며 "윗선에서는 AI 개발에 적극적인 분위기이고, 회계법인들이 도입 경쟁에 앞장서는 모습인데 원하는 대로 AI가 충분히 고도화된다면 내부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전문 인력을 고도화된 업무에 집중시키고, 경쟁을 해결해보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AI가 오히려 현장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