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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고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유동성 관리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보수적 운용 전략으로는 앞으로 쌓일 현금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란 관측이 많다. 자금 규모가 국내 금융시장 수용 능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만큼 자본배분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18일 기준 증권가의 올해 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 눈높이는 200조원에 육박했다. 외국계 투자은행(IB)에 비해 다소 보수적인 가정이 많이 반영돼 있으나 추정치는 매일 같이 오르고 있다. 올해 순이익 규모에 대한 평균적인 추정치만 약 165조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70조원의 설비투자(CAPEX) 지출, 30조원가량의 주주환원을 가정해도 연말에 남기게 될 현금이 150조원 안팎으로 계산된다. 분석대로라면 연말 현금성 자산이 260조~270조원에 달하게 된다는 얘기다.
추정에 불과하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라 볼 수 있지만 훨씬 더 공격적인 분석들도 적지 않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달 삼성전자의 올해 연간 영업익이 298조원, 순이익이 242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해당 모델을 적용하면 올해 유입될 순현금 규모는 220조원에 육박한다. 올해 기획재정부의 국고채 총 발행 한도(225조7000억원)와 맞먹는 규모의 현금이 곳간에 새로 들어차는 셈이다.
애플·구글 등 美 빅테크 현금 관리와 비교하는 시각
현금 쌓이는 속도가 쓰는 속도를 압도하기 시작한 만큼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늘고 있다. 기존의 현금 운용, 자본배분 전략으로는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만한 수준의 현금 창출력과 보유고를 가져본 기업 자체가 드물다. 비교 가능한 사례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정도가 꼽힌다. 이들 기업은 일정 수준 이상의 현금이 쌓이면 ▲자금관리 조직(Treasury) 전문성을 높여 유동성 운용 효율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 자본배분 정책을 강화해왔다.
이미 시중은행들이 삼성전자의 예금을 거절해 조 단위 국채 투자를 검토해야 한다는 등 내부 사정이 새 나오고 있다. 초호황(슈퍼사이클) 초입인 지난 4개월여 동안 20조~30조원 수준 현금이 유입됐을 뿐인데도 시장에서 부담을 표하는 모양새다.
채권시장 한 관계자는 "반갑긴한데, 부담스럽다. 지금 검토중인 투자는 늘어날 현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라며 "3개월 이내에 안정적으로, 필요하다면 수시로 인출 가능한 상품풀 자체가 많지 않고 간접투자 방식으로 삼성전자 노출을 최소화한다 해도 근본적인 해답은 아닐 것으로 본다"라고 전했다.
연말로 갈수록 현금 쌓이는 속도가 더 가팔라질 텐데 회사가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대비했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상반기에만 16조원어치 자사주를 사들이기로 했지만 역부족일 거란 평이 많다. 애플의 경우 10년 이상 막대한 자사주 매입·소각을 나선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미국 국채나 회사채, 주택저당증권(MBS) 등에 분산 투자하며 현지 채권시장의 주요 투자자로 자리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메모리 산업 특성상 보수적 기조가 고유 경쟁력으로도 작용
물론 애플 같은 기업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업'의 특성 만큼이나 보유 현금의 의미 자체도 다르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빅테크 대부분은 플랫폼 기반 사업 구조를 띠고 있다. 한 번 지배적 점유율을 확보하고 나면 매출 변동도 제한적이고 대규모 CAPEX가 필요하지도 않으니 유입되는 현금을 쌓아둘 필요가 없다. 비교적 만기구조가 긴 상품에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고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도 자주 시행할 수 있는 셈이다.
반면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제조업 중에서도 가장 업황 변동성이 크고 한해 CAPEX가 50조원에 달할 정도로 자본집약도가 높은 산업군에 속한다. 메모리 외 비메모리나 가전, IT기기, 부품 등 연계된 사업 포트폴리오도 다양한 데다 전 세계에 생산공장과 자체 공급망(SCM)을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연간 CAPEX 2배 수준의 순현금 구조를 유지하되 현금 절반은 각지에 쌓아두고 나머지는 머니마켓펀드(MMF)나 예금 등 초단기 상품 중심으로 굴려오는 보수적 전략을 고수해왔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무차입 경영이나 압도적인 순현금 구조는 일종의 'CAPEX 보험' 성격도 있다"라며 "D램 3사가 나란히 적자를 기록한 게 불과 3년 전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꺼내쓸 수 있는 방식으로 현금을 굴려야 하니 지금과 같은 방식이 굳어진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런 보수적 운용 전략이 삼성전자를 왕좌에 올려놓은 핵심 요인으로도 꼽힌다.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불황기에도 투자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려서 경쟁사와 격차를 벌리는 전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선 3년 전 불황 당시 삼성전자가 인위적 낸드 감산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2~3곳 이상 해외 메모리 업체가 시장에서 퇴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지난 수년 동안 기관에서 인수합병(M&A), 신사업 성과도 못 낼 거면 현금 쌓아두지 말고 차라리 배당이나 하란 얘기가 나왔던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주주 불만과 별개로 연간 CAPEX 2배 안팎의 순현금 기조를 유지해온 전략 자체는 삼성전자만의 고유 경쟁력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상 최대 현금 창출력 가지게 된 이상 전략 변화 자체는 불가피
삼성전자로서도 현재와 같은 수준의 메모리 품귀 현상이나 이익 폭등을 예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증권가 실적 눈높이는 어디까지나 시장의 추정에 기반한 것이다. 메모리 수요 급증과 가격 상승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를 단언하기는 어렵고, 지정학적 변수 등 외부 환경에 따라 업황이 급변할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실제로 중동사태 이후로 에너지 공급망 차질이 글로벌 경기 전반을 급랭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선 아직 손에 쥐지 않은 현금을 전제로 유동성 관리 전략에 변화를 주고 공격적인 자본배분 정책을 펼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보면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장에 따른 강력한 메모리 수요는 향후 수년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시장 시각이 모이고 있다. 지정학 변수 등이 인프라 구축 속도에 일시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삼성전자가 기존과는 다른 수준의 현금 창출력을 갖춰가는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미 적지 않은 분석가들이 1~2년 내 삼성전자가 영업이익 기준 글로벌 1위 기업에 등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매 분기 실적 발표를 거치면서 이 같은 구조 변화가 현실화할 경우 자본배분 전략 전반의 재정립이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배당·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확대에서부터 ▲업계 최상의 인재풀 확보를 위한 보상체계 강화, ▲자금관리 조직의 전문성 제고까지 전 영역에서 글로벌 1위로 거듭나야 할 거라는 얘기다. 삼성전자의 기업가치 역시 단순히 실적이나 현금 보유량보다는 이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