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2026년 주주총회 시즌이 막을 내렸다. 기업들은 개정 상법으로 인해 기존 정관을 손보기 위해 여느 때보다 분주한 시기를 보내야했다. 1~3차 상법 개정을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주주권익 보호다. 주주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다 넓히고, 오너와 몇몇 이사진에 국한한 권력을 분산하겠단 취지가 강하다.
현 정권의 기조에 앞장선 곳은 국민연금이다. 지난해부터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기조를 강조해온 국민연금은 올해 주총 시즌에 앞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공표했고, 실제로 주요 기업들으 주총에서 ‘반대표’를 쏟아내며 감시자 역할을 자처했다. 국민연금의 이런 움직임에 재계의 긴장도는 상당히 높았지만, 정작 국민연금은 유의미한 결과물을 손에 쥐진 못했단 평가다.
자산총액 2조원이 넘는 기업들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정관 변경안을 대부분 의결해야 했다. 내년 주총에선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정관 조문을 정비해야 했다. 또 오는 9월부턴 분리선출된 감사위원이 2명 이상 선임돼 있어야 하는데, 감사위원회를 재구성하는 의안을 상정하는 것도 불가피했다.
정관의 변경은 특별결의를 거쳐야한다. 전체 주주의 절반 이상이 주총에 참석해야 하고, 또 참석 주식 가운데 3분의 2 이상으로부터 동의를 받아야한다. 상당수 상장회사들은 정족수를 채우고, 우호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의결권 대행사를 섭외했다. 의결권 대행사들은 때아닌 특수를 맞았는데 이로 인한 해프닝도 발생했다.
경영권 분쟁을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 고려아연에선 MBK·영풍 연합과 최윤범 회장 측이 의결권 대행 절차를 두고 맞붙었다. 최윤범 회장 측은 MBK·영풍 연합 대리인이 고려아연을 사칭했단 이유로 권유 업체 직원을 경찰에 고발했다. MBK·영풍 연합 측은 즉각 반발하며 법적 다툼을 예고했다.
고려아연 주총에선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안건이 부결되는 일도 발생했다. 해당 안건은 다른 기업들 주총에선 주주들의 압도적인 동의율을 기록했으나, 유독 고려아연 주총에선 찬성률이 미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양측의 치열한 수싸움으로 인한 결과물로 해석되는데, 개정 상법에 따라 오는 9월 전까지 조문 정비가 완료해야하기 때문에 머지않은 시일 내에 임시주총을 소집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주총에서 개정 상법 과제를 풀어내지 못한 기업들 가운데, 9월 전 임시주총을 소집해야하는 기업들이 많다. 한화투자증권, 한화손해보험, 한화솔루션, HS효성첨단소재, SK증권, OCI, KG스틸 등은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조항을 삭제하려했지만 실패했다. 호텔신라는 안건을 철회했다. 집중투표제는 기업 오너 또는 최대주주에겐 의결권이 제한되는 불리한 제도이기 때문에 해당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정 상법에 대응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주권익 보호에 방점을 찍은 법안이 통과함에 따라 주주연대가 수면위로 드러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앤컴퍼니의 경우 주주연대와 손잡은 조현식 고문이 주총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 현 경영진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제안 안건은 주총을 통과하진 못했다. 당초 한국앤컴퍼니 측은 3%룰로 인해 감사위원 선임 과정에서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단 위기감을 갖고 있었지만, 일단 이번 주총에선 감사위원에 외부인이 진입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다만 회사가 상정한 안건 중 이사회의 정원을 최대 15명에서 최대 11명으로 줄이는 안건은 부결됐다.
한국앤컴퍼니와같이 이사회 정원을 축소하는 안건은 올해 주총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정관 변경과 같은 복잡한 작업을 통해 이사진을 축소해야 하는 안건은 과거 주총에선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올해는 삼성, 효성, 한화, LS그룹 등 기업 계열사들의 주요 안건으로 상정됐다. 이는 집중투표제 도입이 의무화함에 따라 이사의 수를 줄이거나 이사의 임기를 분산해 외부 인사의 경영진 합류를 막겠단 의도가 강했다.
국민연금은 이같은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 전략을 상법 개정의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주총에서 반대표를 행사했다.
삼성전자, 삼성SDS, 효성, 효성중공업, 효성티앤씨, 엘앤에프, LS일렉트릭, 종근당, 하이트진로, 세방전지 등의 기업들이 이사진을 규모를 축소하거나 임기를 유연화하려는 방안을 추진했다. 국민연금은 해당 기업들의 주총에서 이사 권한과 관련한 안건에 모두 반대표를 행사했지만, 효성중공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 안건은 모두 주총의 문턱을 넘었다.
국민연금이 올해 주총에서 집중한 안건은 사내외 이사의 선임, 이사의 보수 한도 등이었다.
연금은 과거 기업가치 훼손 전력이 있거나 감시의무를 소홀히 한 이사진에 대한 재선임엔 반대표를 행사한다. 올해는 대표적으로 한진그룹에선 조원태 회장과 우기홍 부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선임에 반대했다. 한진과 신한금융그룹을 비롯해 국민연금이 이사 선임에 제동을 걸었던 기업들 상당수는 무난히 주총을 마쳤다.
연금이 이사의 보수 한도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하는 주된 경우는 ▲보수가 회사의 규모와 경영성과 등에 비추어 과다하다고 판단될 때 ▲등기임원에 대한 보상 내역과 보상 체계 등 객관적으로 보상 수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등이다. 이 역시 대부분의 주총에선 큰 잡음 없이 안건이 통과됐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세부 기준을 정하고 일관성 있게 이를 적용하는 건 바람직하다 본다"며 "다만 개별 기업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계적인 반대표 행사만으론 근본적인 경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실효성 있는 방안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